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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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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살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BY 박예천 2008-12-25

 

살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도대체 몇 년이나 묵은 것일까.

신혼 때 남편 학교로 우표 붙여 보낸 편지도 눈에 들어오고, 잊고 지냈던 유치원 근무시절 사진들도 고개를 내민다. 정리를 하다말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낡은 편지도 다시 읽어가니 슬슬 재미가 붙는다. 

물건들을 포개던 나의 시야에 낯 설은 공책 한 권이 들어왔다.

제목엔 무슨 가계부라고 이름 적혀져있었고 연도를 확인하니 내가 시집오기 전이었다. 첫 장을 넘기니 휘갈겨 쓰기는 했지만 분명 남편의 글씨체다. 영수증을 붙여놓은 페이지도 있고 조목조목 지출 명세를 적은 칸도 보인다. 타고난 좁쌀영감이었음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좋게 표현하면 꼼꼼하고 찬찬한 성격이라 해야 하건만 요즘 점수 잃은 남편을 곱게 보기 싫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글귀가 보였다. 빨간 펜으로 한 줄 적어놓은 내용은 ‘살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이다. 피식 소리 없이 웃으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혼자말로 “연애하는 기분 좋아하고 있네. 내가 지금 연애하며 사는 거냐?” 했다.

예복이며 패물 값, 신혼여행 경비가 상세히 적혀있는 것을 보니 결혼식전에 나름대로 정리해둔 내용인 듯했다. 마치 다른 부부의 일상을 훔쳐보듯 읽어내려 갔다.


남편과 나는 만난 지 삼 개월 만에 번개처럼 결혼을 했다.

급하게 다가오는 그를 피하며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하려는데 자기 곁을 떠나려는 것으로 불안해하며 결혼을 서둘렀다. 얼떨결에 결혼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자고 일어나 보니 그의 부인이 되어있는 식이었다. 연애기간 짧은 것에 늘 불만 가득했던 나를 달래는 유일한 남편의 말은 연애하듯 살자는 것이었다.

아! 결혼 전에는 무슨 말인들 못하랴.


시부모님 모시고 한 집에서 살다보니 깨소금 신혼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몇 년 세월이 살같이 지나가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연애하는 기분이라는 말은 남편만의 독백이었고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누구나 결혼하면 남자들이 바뀐다고 했지만 설마 내 남편만은 아닐 것이라는 무딘 내 믿음.

주말엔 늘 가족과 함께 보낼 것이라고 가족이 먼저임을 누누이 강조했던 그 남자가 지금의 내 남편이란 말인가. 틈만 나면 친구들 소집하여 밖으로 나갈 궁리 꾀하고 낚시며 등산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태반이다. 마주 앉아 밥한끼 먹어 본 일이 아득해지는데 정말 이것이 연애하는 것인가.


어쩌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경우.

제발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단 한번만 물어봐 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쳐댔건만 개가 짖는 양 자기 내키는 대로 데리고 다닌다.

점심에 칼국수를 잔뜩 먹어 목안까지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오는데도 한마디 묻지도 않고 남편이 큰 맘 먹고 데려간 곳은 시내에서 유명하다는 뽕 칼국수 집.

중화요리를 주문해서 먹게 될 때도 나에게 무엇을 먹을 것이냐 묻지 않는다. 역시나 일방적인 목소리로 “자장면 둘 하고요. 짬뽕 하나 부탁해요” 하며 전화를 끊는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볶음밥이 먹고 싶은 날도 있는데....., 괘씸한 남자 같으니.

얼굴 붉히고 다투기도 꽤 많이 했는데 고쳐지질 않는다. 속이 거북해서 산뜻한 냉면이 먹고 싶은 날도 자기 마음대로 튀김 닭을 시키거나 삼겹살을 굽는다. 어쩌다 한번 아내를 위해 물어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요즘엔 그저 사주는 것도 감지덕지하다 생각하며 따라다닌다.


결국 남편은 총각시절 빨간 글씨 한 줄 적어놓은 것 때문에 공개적으로 욕을 먹는구나.

알고 지내는 어른께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남자들 젊어서는 밖으로만 돌죠? 나이 먹으면 아내밖에 없는 것 깨닫고 돌아옵니다.”

즉시 반기를 들며 내가 말대꾸를 했었다.

“그때는 아내도 나이 먹잖아요. 좋은 시절 다 보내고 힘없어진 아내 데리고 어딜 다닐 건데요?”

생각할수록 남편이 아니 남자들이 얄미워졌다.


새로운 고민하나 생겼다.

‘살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라고 했으니, 아직은 유효기간이 남아있지 않을까. 좀 더 남편을 지켜 봐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껏 산 세월에서 보여준 무성의함을 처절히 응징해 주어야 한다는 두 마음이 생긴다.

두고 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나 자신을 본다.

그래. 살면서........,살면서 라고 했으니 어디 더 살아보기로 하자. 


밤늦게 친구 불러내 가을바람 어쩌고 분위기 느끼러 나간 남편의 뒤 꼭지가 엄청나게 가려울 것이다.

어이, 남편 님!

가을 기우는 것에 눈가가 젖어오고, 은행잎 노랗게 나부끼면 쿵하고 가슴 저밀 줄도 아는 아내이기 이전에 나, 여자임을 알고 계시라.


2003년 늦은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