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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부른 모성(母性)


BY 박예천 2008-12-24

 

                    죽음을 부른 모성(母性)

 

 

 


 

 아들의 강릉행 언어치료가 있는 날이다.

늘 그렇듯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가져 간 책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가방 속 책 꺼내기가 귀찮아져 벽면에 자리한 여성잡지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광고가 반은 넘게 실려 있는 잡지를 건성으로 넘기고 연예인들의 잡다한 사생활들도 대충 머릿글만 읽으며 그림책 보듯 한다. 시선이 아찔한 현기증 느끼며 멈춘 곳은 이미 티브이나 신문지상을 통해 나왔던 기사내용이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세 아이와 고층 아파트에서 자살을 해버린 여자의 이야기. 잡지의 두 면을 꽉 채울 만큼 자세히도 설명 해 놓았다. 일곱 살과 다섯 살 남매 먼저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나머지 세 살 박이 아이를 안고 투신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마치 그 장면이 곁에서 일어난 듯 생생하게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실직한 남편은 집을 나가고 카드 빚 삼천 만원을 갚지 못해 속 끓이다가 생긴 일이었다. 혼자 죽는다면 남겨진 자식들 누가 돌볼까 걱정 앞서 함께 데리고 간 것이다.

 

한 두 해전이던가. 이곳 속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섯 살쯤 된 사내아이를 두고 엄마가 물건 사러 가게에 나갔다고 한다. 베란다 밖으로 돌아오는 엄마 보며 반가움에 의자 놓고 올라섰다가 떨어져 사고를 당했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엄마는 날마다 사진 끌어안고 정신 놓은 사람처럼 살았고 아들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자살 해버렸다. 남아있는 시어머니 비롯한 가족들이 ‘아들 잡아먹은 년'이라며 정신적인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아들이 간 자리에서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전자의 잡지기사 속 여자처럼 생활이 힘들어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었다.

 

고추당초 맵다한들 시집살이보다 더할까 하며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았던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 여인의 죽음 앞에 어떤 제목을 붙여 풀어내실까 궁금해진다.

당장 내 친정어머니만 해도 훌훌 떠나시려 했다가도 어린 자식 밟혀 고생길 참고 사셨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을 대하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신의 위치로 비춰본다.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다. 나 역시도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보니,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여겨본다. 오죽했으면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 측은지심이 생긴다. 허나 살려 달라 애원했을 아이들을 강제로 떠밀어 죽음으로 내 몰고 간 것이 과연 모성일 수 있을까.

모성이란 여자가 어머니로서 지니는 본능적인 성질이며 그것은 사랑을 동반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남녀 간의 사랑에도 그렇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입장 이해해주며 배려하고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과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죽음이었을까를 자살한 여인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태어나게 한 부모였기에 죽일 권리도 있다는 주장아래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살아남아서 삶을 누리고 지탱하는 것은 당연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흔히 하는 말처럼 그리 죽을 용기가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개를 내미는 아픔은 차마 자식을 남겨두고 갈 수 없었던 어미의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고아로 성장할 아이들이 겪어내기에는 사회적인 제도와 사람들의 냉대가 아직은 힘든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반드시 섭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힘겨움에 때로 좌절도 하고, 넘어져 일어날 수 없을 만큼의 짓누름을 당하기도 한다.

이제 겨우 짧은 인생을 경험한 나는 반드시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이 주어진다고 본다. 어두움의 무게가 눈앞에 닥칠 때 반대로 자신감을 갖곤 했다. 그것이 일순간의 자위일지라도 내 자신의 삶을 가꾸는 일에는 커다란 도움이 되어왔다.

‘이 일은 나밖에 할 수 없다. 견뎌낼 수 있는 이가 나 한사람이므로 나에게 주어졌다'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힘겨움이 감사로, 어려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들의 장애를 처음 알게 되면서 슬픔도 있었고 한때는 좌절도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나가는 소낙비였다. 아들이 그런 모습으로 나에게 온 것은 분명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인지라 가끔 갈등의 순간과도 만나지만 기다림은 선물을 꿈꾸게 했다. 무엇을 주시려는 것일까 하는 인내심으로 하루하루 채워가고 있다.

이런 모든 표현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나를 교만한 사람으로 묶어둔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처럼 살 것이다.

 

언어치료를 마친 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슴 철렁한 일을 당했다. 매표소 창구로 돈을 내밀고 표를 받는 아주 잠시의 순간 뒤를 돌아보니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넓기만 한 대합실을 마구 뛰어다니며 아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아래 위층으로 뛰어다녀도 보이지 않자 나는 그만 사색이 되어 미친 여자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가들은 즐비한데 어디부터 뒤져야 할지도 난감했고,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을 치는 것이다.

정말 아들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찻길로 달려 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살아갈 자신이 없을 것 같은 캄캄함이 앞을 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파란모자 쓴 사내아이의 행방을 물어도 모두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남편과 시어른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가슴이 미어지듯 억눌려왔다. 혹시나 하고 전자오락실을 들려보니 커다란 화면 앞에 앉아서 몰두하고 있는 아들이 눈에 띄었다. 엄마를 보자 씩 웃으며 걸어 내려온다.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엄마 얼굴을 쳐다보는 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다. 아찔한 순간이 지나고 평온함이 찾아오자 아들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혼을 내주었다. 그때부터는 아들의 울음이 대합실 안을 채우며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전에 보았던 잡지내용의 무겁던 마음이 아이를 잃을 뻔 한 충격과 겹쳐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내내 가라앉질 않았다.

 

배가 고플 아들을 위해 된장국을 끓여 저녁상을 차렸다. 남편은 회식으로 늦고 딸아이는 할머니 댁에 있으니 아들과 나만이 먹는 조촐한 밥상이다. 반찬을 얹어 한 숟가락씩 넣어주니 새끼제비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잘도 받아먹는다. 오물오물 씹는 입 모양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낮 동안의 일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고, 나는 한 마리 어미 새가 되어 아들의 입안에 먹이를 날라주고 있다.

죽은 여인과 세 아이가 둥지를 박차고 찾아간 그곳은 고통 없이 따뜻한 곳일까.

오늘밤은 늦도록 잠들지 못할 것만 같다.

 

 

2003년 9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