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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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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지원군


BY 박예천 2008-12-24

 

지원군



딸 키우는 재미를 새록새록 느끼는 요즘이다.

아홉 살로 접어들면서 녀석의 생각수준은 거의 나와 친구관계를 맺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워낙에 나이답지 않은 철부지 행동이 잦은 어미이기도 하지만, 또래보다 숙성한 것은 사실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남편이 우리 모녀를 대하며 늘 이르는 말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이다.

장난기 섞인 아빠의 말투에 딸을 대견하게 보는 맘이 엿보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일일 장터가 열린다고 했다. 내용인즉 여러 조로 나뉜 친구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된 물건들을 가져와 맞바꾸는 행사였다. 자신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용하게 쓰이게 되니 참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라 생각되었었다.

이삼일 전부터 자신에게 정해진 물건이 책이라며, 이제는 읽지 않는 책을 몇 권 정리하고 챙긴다. 모형 화폐까지 만드느라 칼로 긋고 오리고 바쁘다.

그러더니 대뜸 나를 향해 묻는다.

“엄만 필요한 게 뭐야? 사다 줄 테니 말해봐.”

“뭐든 다 있어? 옷 한 벌 사와라. 하긴 나한테 맞는 것이 있기나 하겠냐.”

웃자고 해본 소리건만 딸아이가 펄쩍뛰며 까르르 넘어간다.


며칠 뒤 아들의 치료를 다녀와서 파김치로 주저앉아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열쇠 금속음이 들린다.

“우리 딸, 어서 와라 힘들었지?”

“짜~잔!, 엄마 이것 봐라 내가 엄마 선물 사왔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물물교환 장터가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내민 것은 연필 한 자루.

“어? 이건 네가 써야지. 너한테 어울리는 물건이잖아”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가슴이 짠해왔다.

“응, 근데 요즘 엄마가 글이 안 써진다고 힘들어해서 이걸루 좋은 글 많이 쓰라구.....”

원고마감 일에 끙끙거리는 유명작가도 아니고 대단한 작품을 세상에 내밀지도 않았는데 내 모습이 가엾어 보였나.  


아빠가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오늘은 월요일.

아들과 딸이 나와 정삼각형 위치로 앉아 저녁밥상을 맞는다.

재잘재잘, 밥 수저 입에 넣는 횟수보다 말이 되어 나오는 바람이 입 밖으로 더 많이 숭숭.

기대하지 않았던 수상소식을 넌지시 전해주니 제 일처럼 기뻐한다.

“엄마! 이젠 정식 작가 된 거야?”

아홉 살 자식 앞이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럽다.

소리 없이 밥공기 앞에 시선을 떨구고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얄미운 녀석의 계속되는 따발총.

“엄마는 그럼 걱정되겠다.”

“왜? 뭐가?”

“생각해봐. 작가가 되기 전에는 글을 못 써두 사람들이 그냥 이해를 하겠지만, 이제 못 쓰는 글 보여주면 상탄 작가가 뭐 이래? 그럴 거 아냐.”

이건 딸이 아니라 송곳을 들고 대드는 왕벌이다.

어쩜 그리도 아픈 곳만 골라가며 팍팍 쑤셔대는지, 그것도 꼭 맞는 말들로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딸의 다음 말이 압권이다.

“아빠는 책이 많은데 엄마는 왜 맨날 빌려서 봐? 이다음에 내가 돈 벌면 책 많이 사줄게.

그리고 말이야 정말 월급이 쥐꼬리래두 그때까지 엄마가 글을 쓰고 있다면 컴퓨터 젤 좋은 걸루 한 대 사줄 거야 약속!”

울고 싶어라! 영화를 찍어라.

툭하면 컴퓨터 차지하고 앉아서 게임만 쏘아대는 것이 미안하긴 했나보네.

막강한 지원군 어린양이 쌕쌕 잠이 들어있는 깊은 밤,

그녀의 어미 되는 이 여인네는 낡은 자판 위에 영양가 없는 열 개의 지문만 찍어대고 있다.


다량의 서적과 최신 컴퓨터를 얻어야 할 텐데 이리도 게을러서 어찌할꼬.


 

2004년 9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