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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자녀에게 식당에서 술을 권하는 부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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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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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천 2008-12-23

 

                    

 


 

 거죽에 붙어 눈으로 확인되었다면 벌써 없애버렸을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 속살에 좁쌀크기 만한 사마귀였어도 찾아 떼어내고 말았으리라.

헌데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월중행사에 겹쳐있어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다. 하루정도 아랫배 움켜쥐고 인상 몇 번 찌푸리면 될 정도였으니까. 겨우 생리통쯤인데 유난떨기 싫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길을 걷다가도 움찔 전기 오듯 통증이 느껴졌다. 멈추고 잠시 쉬면 또 잠잠해졌다. 

그럭저럭 뱃속에 혹을 키우고 있었으니 어찌 이다지도 미련한 곰이란 말인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 딱 그 꼴이 되었다. 진즉에 진찰이라도 받았다면 그리 오랜 세월 통증 참느라 고생하지 않았을 거다.

의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웃는다. 더 이상 두고 볼 상황이 아니라며 수술을 권했고 결국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수술과 입원을 마치고 집에서 팔자 늘어지게 쉬고 있었다. 난생처음 맞이한 긴 휴가이다.

혹 떼어 낸 기분이라면 개운해야 마땅한데 그게 아니다. 뭐랄까. 나만의 은밀하고 신비로운 아기집에 내내 간직해 왔던 뭔가를 빼앗긴 허전함이 밀려왔다. 차후 통증 없는 건강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건만 묘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동고동락한 벗을 잃은 맘이라고 해야 맞을지 형언키 어려운 상태였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었다. 과연 어느 쪽이 ‘혹’이었을까 하는 되물음이 메아리쳤다.

내가 혹을 떼어 낸 것이 아니라 작은 혹 녀석이 덩치 큰 나를 밀어낸 것 같아 씁쓸해졌다. 볼품없는 인생을 엮어놓으니 그런 녀석에게조차 버림받는구나 싶었다. 괘씸한 혹 같으니.  

 

불혹 갓 넘긴 생의 줄기를 키운 나의마당. 가만 들여다보니 혹이 꽤 여럿이다.

컴퓨터모니터의 뿌연 화면을 벗 삼아 자판 두드리는 이 시각에도 혹 하나가 곁에서 쌔근거리고 잔다. 저 낳은 어미가 녀석을 ‘혹’이라 칭하는 줄도 모른 체 이불 걷어차고 방바닥을 뒹굴고 있다. 간혹 잠꼬대인지 종알거리다가 ‘엄마!’를 찾기도 한다.

녀석은 알고 있었을까?

발달장애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 어미의 혹으로 당당히 임명된 사실을.

이리저리 달고 다니다가 지치는 날엔 주저앉아 떼어내려 통곡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소리치며 달려들곤 했었다. 질긴 운명으로 만난 핏줄의 당김이었으리라. 

차라리 같이 죽자 했던 날을 기억한다. 내게 붙은 혹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아들도 나와 똑같은 분량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태어났던 것을 잊었다.

세상 어떤 의술이나 기구로도 떼어내지 못할 아들과 나는 그렇게 혹이며 또한 몸이었다.

 

녀석은 키와 몸이 자라면서 아픔도 참아내면 빛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통 속에 피어난 꽃이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배우게 했다.

혹이라 여겨 떼어내려 했던 지난날들이 부끄럽게 고개 내민다.

아들이 내게 깨우쳐주었다. 오히려 어미인 내가 녀석에게 혹으로 붙어 연명하고 있다는 것 까지도.

아들이 아니었다면 삶의 기준이 없었을 테고 작고 소박한 일상들에 대한 감사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아들에게 제발 나를 떼어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다. 

참된 혹으로 인해 값진 덤을 얻어 사는 인생이다.

 

가깝게 접하는 혹 한사람 더 소개한다면 바로 남편이다.

그와 나는 가끔 서로를 향해 네가 혹이거니 삿대질 하고 산다.

어쩌다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는 때가 있다. 허리춤에 장검을 꺼내어 싹둑 잘라내고 싶어진다. 증오심으로 칼날을 갈고 세우고 접고의 반복인 셈이다.

눈앞에서 안보이면 묵은 체증이 사라지고 두 다리 뻗으며 잠도 푹 잘 것이라 여겼다.

허나 미운정도 정이라 했던가. 아니면 익숙함에 대한 허전함이었을까. 단 며칠이라도 집을 비우는 날엔 내 쪽에서 먼저 좌불안석이다. 손가락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습관처럼 주무르다 없어진 어느 날의 기분이라 해야겠다. 사랑이니 정이니 표현하기엔 아직 내 자존심이 풋내로 싱싱하다.

사실 누가 혹이고 아니겠는가. 웃으며 울며 세월 부대끼다보니 서로 한 덩이가 되어버린 것을.

또 다른 내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살면서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뜻하지 않게 혹이 되기도 하고 떼어 낼 혹이 생기기도 한다.

거대한 우주에 나를 비추어보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혹이던가. 눈에 뵈지도 않을 미세먼지 크기나 될지 모르겠다.

더불어 구르다보면 한 덩이로 뭉쳐지게 되니 헛된 싸움에 목숨 걸지 말아야 한다.

그나저나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혹으로 정해놓고 가슴앓이 하는 것은 아닌지.

수술부위에 남은 묵직한 통증이 가슴으로 전해온다.

에고 이 불쌍한 사람아!      




2008년 1월 14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