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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우를 찾아서


BY 박예천 2008-12-23

 

                   멍우를 찾아서

 

 


 강원도 사람들은 머위를 ‘멍우’라고 부른다. 간혹 머우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이도 있다. 익살스러우면서도 친근함이 느껴져 경기도 출신이지만 나도 덩달아 멍우라고 한다.

머위는 습지에서 자라는 오래 살이 풀인데 땅속줄기가 사방으로 뻗으며 자란다. 잎은 곰취나물 처럼 둥글고 크다. 봄에 나온 어린잎은 씁쓸한 맛을 우려내고 쌈으로도 먹는다. 사실 머위는 잎보다 잎자루를 더 많이 먹는다. 잎을 따버린 줄기를 삶아 물에 담근 후 아릿한 맛을 우려내고 껍질을 벗겨내어 조리한다. 들기름과 조선간장 넣고 버무려서 기본양념으로 볶아내면 그 맛이 일품이다.

 

갓 시집 온 새댁시절, 밥상에 머위반찬이 놓여있는걸 보았다. 강원도 고구마줄기는 왜 이렇게 통통하고 굵으냐는 내 말에 시어머니는 파안대소하며 머위를 소개했다. 그렇게 나는 멍우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사실 처음엔 별로 맛도 없었고 구미를 당길 만큼의 모양새도 아니었다. 뭉턱뭉턱 토막내어 아무렇게나 버무려 놓은 반찬에 젓가락이 자주 갈리 만무하다. 그러던 것이 호적까지 파들고 와 강원도 땅 깊숙한 골짜기에서 오래 살아서인가. 지금의 내 모습은 거의 머위귀신이다. 입맛도 남편의 식성을 닮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지조 없이 강원도 사람이 될 줄이야. 산과 들의 푸성귀는 죄다 맛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머위 대를 꺾느라 손가락에 자주 풀물이 든다.

 

둑이나 야산중턱 풀 섶 위로 솟아난 머위의 무리를 먼 거리에서 보라. 마치 호박넝쿨이 보기 좋게 늘어진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이다. 중간에 황금색 꽃이라도 한 송이 피었더라면 나는 분명히 그것을 호박넝쿨로 보았을 것이다.

생활풍습이 다르고 말투도 익숙하지 않아 외로웠던 나의 결혼 초, 머위는 친정을 그려다주는 새로운 벗이었다. 담벼락아래 앞다투어 넓적한 잎새를 달고 초록으로 기어오르던 호박넝쿨이었다. 머위 대를 뜯을 때마다 그렇게 친정의 뒤란을 그렸다. 잎새 뒤에 슬쩍 제 몸을 감추고 있는 애호박을 용하게도 잘 찾아왔었다. 그런 손녀딸을 대견해 하시던 할머니가 머위 잎 뒤로 떠오르곤 했다. 화덕에 올려놓은 솥에서 보글거리며 된장국이 끓고 숭덩숭덩 호박이 던져지던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집 냄새였다.

내가 멍우라고 불러대며 녀석들을 한 묶음씩 훑어오는 것은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정이 들어서이다. 말캉말캉한 줄기를 씹어 목구멍 뒤로 매정하게 넘겨대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는 이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위의 맛은 약간 쌉싸래하면서도 향긋함이 어우러진 맛이다. 머위 대를 씹을 때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첩첩산중의 신선이 된다. 자연이 베풀어준 향연에 초대되어 소박한 밥상을 받는다. 흙의 양분이 나에게까지 전이되는 듯 하다. 자연인이 되니 헛된 욕심도 없어진다. 고구마줄기를 즐겨 볶아먹었던 친정어머니의 익숙한 손맛이다. 시집살이 낯설음을 처음으로 가려준 벗이 머위다. 강원도 먼 땅에서 친정을 그리워하는 가슴에 멍이라도 들까 선뜻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멍우라는 이름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봄의 끝자락부터 해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낮에는 거의 삼복더위를 실감케 했다. 높은 기온과 때맞추어 적당히 내려준 비를 먹고 자라서인지 머위가 지천이다. 재배를 목적으로 집 앞에 심어놓은 것은 꺽지 않는다. 야생으로 자라는 것만 골라 솎아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가면 껍질 벗겨 파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이웃의 말에 미소로 답해주었다. 총각무를 다듬을 때 하얗게 벗겨지는 끝의 개운함을 아는지라 삶은 머위줄기 벗기는 일도 즐거움이다. 줄기가 한 겹옷을 벗으면 내 속에 가득했던 잡념까지도 껍질과 함께 뭉개진다. 시집살이의 어색함을 덜어준 벗이니 옷 벗겨내는 일쯤은 직접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대가 없이 거저 주는 자연의 선물을 덥석 받아만 먹고도 늘 빈 그릇 들고 찾아가 머리 조아린다. 산과 들 앞에서 여름 내내 그렇게 가난한 동냥을 해도 부끄럽거나 수치심이 들지 않는다.      

 

겉옷을 벗고 알몸이 된 머위 줄기는 향신료나 화학조미료로 치장된 옷을 걸치지 않는다. 가장 한국적인 들기름과 조선간장을 비롯한 양념 몇 가지가 전부이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모시나 바람 술술 통하는 삼베옷을 입은 옛사람 모습이다. 이미 지니고 있는 특유의 향이 있어 간만 맞추면 된다. 날마다 분칠과 갖가지 장신구로 여물지 못한 속내를 가리고 다니는 나는 이제 보니 머위만도 못하다. 

 

또한 머위의 사랑 방식은 요란하지도 않다. 호박이나 포도처럼 넝쿨을 비비꼬아 서로 부여잡고 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제각기 연결되지 않은 듯 다른 포기로 보이지만 땅 속 줄기는 은근한 사랑으로 엮이며 번식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눈빛만으로도 신뢰가 오가는 오래 묵은 부부의 사랑이다. 침식되기 쉬운 경사지나 논두렁 위에 일부러 머위를 심는 것은 바로 그 뿌리의 결속력 때문이다. 여러 성질의 토양으로 이루어진 가족들이 모진 세상 비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얽어매는 그물이다.

들녘에 흔해빠진 머위에게서조차 이토록 오묘한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되니 역시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올 여름 내내 멍우를 찾아 나는 얼마나 많이 들판을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넓적 손 잎새를 맞잡으며 할말도 꽤나 많았다. 희미해진 친정의 추억대신 남편과 내 자식들 얘기를 퍼 올리며 멍우의 손마디를 낚아채었다.

껍질 벗겨놓은 머위 대에 양념을 넣고 주물럭거리다 볶는다. 벌써 입안에 군침이 돈다.

통통하게 물오른 풀빛 속살을 한입 베어 물었다. 씹을 때마다 여름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의 단내가 물컹거리며 입안에 고여온다.

멍우야! 참말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