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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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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메시지친구


BY 박예천 2008-12-23

 

                  메시지친구

 


시부모 두 분 중, 나는 시아버님을 0.5그램만큼 더 존경한다.

존경심을 저울눈금으로 굳이 잴 수 있다면 말이다.

시어머니 들으시면 여간 섭섭할 일이 아니지만, 솔직한 내 심정이 그렇다.


조실부모하여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도 아닌데,

유독 시아버님께 향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사람을 비교하여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와 전혀 다른 시아버지의 성품을 대하며

느끼는바가 크다.

당신 뜻에 맞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버럭 언성부터 높이는 친정아버지에 비해,

시아버지 대화기법엔 상당한 설득력이 담긴다.

늘 차분한 어조로 분위기를 안정시킨다.


톤이 높고 공격적인 말투인 친정 분위기를 대하다가,

시집을 오니 모든 말소리들이 잔잔했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도 당황하거나 고함을 치지 않는다.

그 속에 미운오리새끼마냥 톡톡 튀는 내 음색은 거의 옹기 깨지는 소리였다.


시아버님의 훈계는 뒷맛이 달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라 해도 무시하거나 하대하시는 법이 없다.

오래 소망해 온 자상한 아버지의 표상 같으신 분이다.


양력 9월 5일, 오늘은 아버님 생신이다.

직장 생활하는 자식들의 사정상 생신전날인 일요일에 모였다.

미역국을 끓이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상을 차렸다.

각자 준비한 선물도 드렸다.

하룻밤 묵으며 시댁에서 세끼 식사 함께 한 것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생신 당일 아침진지를 지어드리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렸다.


월요일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려야지 했다.

시댁에서 삼십 여분 거리의 산에서 아버님은 아직도 일을 하신다.

올해 67세이건만 거친 석산공사장 일을 마다않으신다.

오전 여섯시 버스시간에 맞춰 현장으로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녘에 꿈을 꾸었는지 반짝 눈이 떠졌다.

휴대전화시계를 보니 마침 여섯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아이가 곁에서 자고 있어 통화하기는 그렇고, 문자를 찍어보았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여기까지는 형식적인 문구이다.

장난기가 발동한걸까, 응석이었을까.

‘맏딸 ㅇㅇ 드림’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누르고 말았다.


어쩌면 정말 딸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정 부모님 생신 상을 내 언제 그렇게도 힘들여 준비한 적이 있던가.

시집온 올케에게 딸의 빈자리를 넘겨주었듯이,

시아버님의 당당한 맏딸이기를 떼쓰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설마 문자를 읽으실 줄 아시겠는가.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느긋하게 다시 전화를 하리라.


깨었던 꿈이 다시 이어 붙는지 잠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드릴소리였다.

윗집에서 몰상식하게 이른 시간부터 뭔 공사를 시작했구나 싶었다.

시아버님 석산현장에서 가끔 들었던 소리와도 같았다.

돌먼지 희뿌옇게 일으키며 바위에 구멍을 뚫어대는 아버님 전용기계다.

두어 번 계속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휴대전화 진동음이 문갑 곁을 두드리며 몸부림을 쳐대고 있었다. 


아버님 전화다.

“애기냐? 하늘이 참 좋구나. 메시지 잘 받았다.”

보는 이도 없는데 낯이 뜨거워졌다.

“어머, 아버님 문자도 읽으실 줄 아세요?”

"그럼!”

갑자기 나는 말더듬이가 된다.

“아니...., 저기요. 전화 드리려다가, 애가 자고 있어서요. 자식들 편한대로

생신을 앞당겨서 죄송했구요.”

“그런 말 말아라. 니들이 편한 게 내가 좋은 거다.”

생전 당신의 아픔이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다.

자식들의 행복이 기쁨이라고만 하신다.

맏며느리 메시지에 가을 하늘 빛을 읽으시는 아버님.


가을이 무르익기도 전에,

나는 그렇게 귀한 문자메시지친구 한분을 얻는다.



2005년 9월 5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