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이의 빨간 운동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수정이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오월에 장애인복지관 그룹치료를 하게되면서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지체장애가 있어 걷지를 못한다. 하지만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처음 그 아이를 보는 사람은 장애아동인 것을 알지 못할 정도이다. 한마디도 않는 무뚝뚝한 내 아들과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어, 다양한 말로 다가서는 아이. 대꾸 없는 아들은 말 대신 행동으로 수정이의 화장실행 휠체어를 밀어준다. 자기 키만큼 높은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레 바퀴를 굴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니던 치료 길을 수정이 아빠가 우리아파트 앞까지 차로 데리러 오면서, 아침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조수석에 앉은 수정이는 몸이 자유롭지 못해 자꾸 문 쪽으로 머리가 닿는다. 바르게 고쳐 앉으려고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힘겨워한다. 아무래도 내 무릎에 앉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몇 번을 안고 갔더니 이제 차만 타면 “아빠, 나 이모한테 앉아서 갈 거야.” 한다.
수정이를 안고 가다보면, 내자세가 더 부자연스럽다. 행여 내 생각만 하느라 자세를 곧추세우다보면 불편하게되니 그 아이에게 맞추어 몸을 감싸 안아야 한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음악을 들으며, 유명가수의 노래를 힘차게 따라 부르는 성격 밝은 아이이다.
며칠 전, 선생님이 드디어 수정이 아빠에게 신발을 준비해달라고 하셨다. 전에 무심코 딸아이가 신다가 작아진 신발을 주려고 했더니, 작은 목소리로 “수정이는 신발 안 신어요” 하기에 말을 꺼냈던 내가 무안해진 적이 있었다.
태어나서 여섯 살이 되기까지 한번도 신발을 신어보지 못 한 아이. 걸음 걷는 연습을 하게되면서 발가락이 자꾸 꼬이니 신발을 신고 걷게 해보겠다는 것이다.
아침에 수정이는 나를 보자마자 “이모, 나 신발 샀어요. 이제 신발장에 내 신발 넣을 거예요.” 라고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평소 친구들이 신발장에 신발을 가져다 놓는 것을 지켜보며, 이름표만 붙은 자기 자리에 얼마나 신발 두 짝을 올려놓고 싶었을까. 함께 기뻐해 주며 치료실 앞까지 들뜬 목소리로 왔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다른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아이들의 화장실 가는 시간이다. 당연히 아들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나올 것을 예상한 내 앞에 선생님의 부축을 받은 수정이가 발을 내딛으며 걷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수정이보다 더 환하게 빛나는 빨간색 운동화였다. 새 주인을 만나 몇 곱절의 행복을 가져다 줄 그 운동화에게 격려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체중은 선생님께 거의 의지하고, 발바닥은 땅에 끌리는 정도였지만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운동화 빛깔을 닮아 홍조 띤 선생님의 힘겨운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가득해있었다. 무거운 걸음 따라 희망이라는 이름의 땀방울이 전혀 힘든 줄을 모르고 흘러내렸다. 화장실에서 선생님이 볼일을 보시는 동안 철 손잡이를 붙잡고 기다렸다는 수정이. 눈물 흘리며 안간힘을 쓰던 나날들이 서서히 빛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실 수정이의 걸음은 함께 그룹치료를 받는 친구들과 어머니들의 기쁨이기도 했다. 손잡이를 잡고 내딛다가 주저앉기라도 하면, 지켜보며 응원의 박수를 쳐주었고 도착지점 까지 걸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 찍어대던 날도 있었다. 수정이와 치료실을 이용하는 부모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시도해보려는 의지가 강해서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려는 것을 지켜보며, 사지육신 멀쩡한 나는 몇 번이고 깨닫고 배우기를 반복한다.
수정이는 오늘도 빨간 운동화를 신는다. 하루가 다르게 힘이 있고 넓어지는 보폭이 금방 이라도 뛰어다닐 듯 기대를 갖게 한다. 품안에 안고 있으면, 작은 새 한 마리 같아 여리기만 한 몸 어느 구석에서 저렇게 강한 의욕이 일어나는 것일까.
옆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화장실에서 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가, 오늘은 손잡이를 의지하고 볼일을 마쳤다는 말을 선생님으로부터 듣는다. 치료시간이 끝나고, 데리러 들어오는 수정이 아빠의 걸음이 힘차고 안면에 미소가 번진다. 이제 과거 속으로 접혔으나 끔찍하기만 했던 옛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한숨짓던 그 얼굴에.
아들이 한 단어 수준이나마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시작했을 때 나도 저렇게 감동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두 단어를 띄엄띄엄 쏟아내는 아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만세를 불렀던가.
수정이의 아픔은 이미 내 것이 되었다. 장애를 겪는 아들이 없었다면, 혀를 차며 동정의 눈길을 보내거나 안쓰러워 하기만 했겠지. 새로운 가족으로 묶이고 엮어지면서 한 마음이 되었다.
어린이집에 간 수정이가 빨간 신발을 내내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듣는다. 낮잠을 자는 순간에도 운동화 이야기만 하다가 잠들었다는 편지를 선생님께 받았다며 수정이 아빠는 자꾸 웃으신다.
“수정아빠 돈 많이 벌어야 되겠어요. 여름샌들, 겨울부츠 사주려면 말예요”하는 내 말에 더 힘을 얻는 표정이 된다.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평생소원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
며칠 내리는 비가 겨울을 재촉한다. 버스정류장까지 찬비바람을 맞지 않아도 되니, 이런 날은 특히 수정이 아빠가 고맙다. 편안한 동행이 있기에 아들과 나는 우산도 필요없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수정이 아빠는 길게 말을 잇는다. “수정이가 만약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아이를 죽을 때까지 안고만 다니라해도 그럴 수 있어요.”
부모마음인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알고 있다. 분명히 수정이는 걷고 뛰어 다닐 수 있을 텐데, 어찌 저렇게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까. 오늘 이 말을 기억 속에 담았다가 나중에 수정이 뛰어 다니는 날 들려주어야겠다. 추억처럼 얘기할 날이 오겠지.
어서 빨리 수정이의 빨간 운동화가 닳아 헌 것이 되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해본다. 새 운동화를 선물하고 싶어져 안달이 난 남자친구 엄마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아들은 한 단어씩의 새로운 말로, 수정이는 힘차고 넓어진 보폭으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보물들이다.
수정아빠! 힘내세요.
겅중거리며 뛰는 수정이 모습을 만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 거예요. 급하지 않게 천천히 갑시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