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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8 - 잔치 열렸네


BY 박예천 2008-12-23

잔치 열렸네

 

 

 

마릿골에서 잔치를 하게 되면 하루나 이틀 전부터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이번엔 누구네 돼지가 선발되어 단두대위에 서게 되었는가. 어린 나와 친구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어 구경을 한다.

돼지 잡는다고 굳이 이장님이 안내방송을 할 필요가 없다. 피를 토하듯 꽥꽥 악을 쓰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려대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는 늘 고수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아버지처럼 맘 여린 사람은 아예 명단에 끼지도 못한다. 단골로 시퍼런 식칼과 도끼를 집어 드는 동네 어른이 있다. 끔찍한 광경을 소름끼치게 무서워하면서도 어른들 틈에 고개를 비집고 들어가 자주 보았다. 그때처럼 돼지의 몸속을 자세히 구경해본 적이 또 없었다. 꼬불꼬불한 내장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 넣고는 했다. 방금 전 상황인 듯 아직도 비릿한 냄새까지 생생한 판화로 남아있다.


돼지를 다 잡은 후 고기를 나눌 때는 꼭 승주네 저울을 많이 찾는다. 그 집 저울이 제일 정확하게 분량을 나누어 줄 수 있었는지 항상 저울은 ‘승주표 저울’ 이었다.

앞다리 쪽이 내 것이다, 아니다 당신네는 뒷다리가 맞는다 하며 티격태격 싸우는 일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도 혀끝에 정확히 각인 되어있는 싫은 맛이 하나있다. 돼지를 잡으면 뿌연 막걸리에 귀한 보물 나누어 먹듯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간을 굵은 소금에 안주로 찍어먹던 동네 어른들. 앞자리에 쭈그리고 앉은 내 얼굴에 ‘그것이 먹고 싶다’라고 써 있었는지 한 조각 떼어 허연 소금에 꾹 누르더니 입안에 넣어주신다.

아! 나는 정말 기막히게 맛이 있을 줄로 알았다. 비릿한 피 냄새와 떫은맛을 어찌 그리도 맛나게 먹는가.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이내 땅바닥에 뱉어버린 후 오래도록 욕지기를 해댔다. 지켜보던 어른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박장대소한다.


드디어 석주네 형의 잔칫날이다. 아침부터 엄마는 학교가 파하는 대로 곧장 잔칫집으로 올 것을 당부한다.

또래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기대감에 부풀어 거의 뛰다시피 동네 어귀로 들어온다. 어떤 녀석은 가방을 등에 달고 그대로 잔치 있는 석주네로 가기도 한다.

지붕높이 비슷하게 하얀색 차일이 쳐있고 장구소리 박자 맞춰 얼큰하게 취한 할머니들의 타령조 경기민요 한 자락이 흘러나온다. 

엄마의 모습을 찾는다. 펌프우물가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긴 광목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사극에서 보던 아씨 같아서 괜히 기분이 밝아진다.

엄마가 손짓하며 곁으로 오라 신호를 보내면 우리 떨거지들은 우르르 달려간다.

장독대 옆에 가면 승주네 엄마가 있을 거라고 한다. 두 분 사이에 그렇게 하기로 사전에 약속한 모양이다.

장독대 맞닿는 뜰에 벌써 맛난 음식 한 상이 차려져있다. 손님에게 나갈 국수에만 얹는 계란지단과 고기고명까지 예쁘게 놓여있다. 군침이 돈다.

아이들 국수에는 그냥 송송 다진 뻘건 김치만 있었건만 엄마의 막강한 후원이 있으니 손님상과 똑같은 수준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양 볼이 미어지도록 떡이며 음식을 잔뜩 먹고 나면 잔치 집 이 곳 저 곳 구경을 다닌다.

술만 먹으면 딴 사람이 되는 당골 어느 어른은 지폐를 슬쩍 기생인지 하는 여자의 가슴속으로 밀어 넣는다. 왜 그것을 보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는지 모르겠다. 목젖 뒤로 넘어가는 그 소리가 울리는 꽹과리 소리보다 더 크게 내 귀에 들렸다.

동네 청년들은 큰상을 이리 저리로 옮기느라 바쁘고 평상 위에 대 광주리 안에는 동글납작한 국수사리들이 잘 끓어 우러난 육수세례를 기다리며 질펀히 누웠다.

그릇을 나르고 닦고 헹구는 순서가 일사천리로 치러지고 있었다. 감독하는 사람이 따로 없는데도 잘 분업화 되어 진행된다.

 

잔칫날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는 혼례 예식 후에 곱게 한복입고 연지곤지 찍은 색시모습이다. 색시는 안방에 방석을 몇 겹이나 깔고 앉아 눈을 지그시 내려 방바닥만 쳐다본다.

석주형의 색시는 참 곱다. 분칠도 뽀얗게 하고 너무 붉지 않은 입술까지 화초처럼 예쁘다.  색시가 자주 인상을 찡그리고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곁에 와보라고 한다. 무릎걸음에 신발을 벗지 않고 옆으로 가니 귀에 대고 방바닥이 너무 뜨겁다 말한다.

나는 색시를 도와줘야 했다. 저녁 때 까지  한 자세로 앉아 있으려면 국수 삶아대느라 불 지펴 댈 아랫목이 뜨거워 견디기 힘들 것이다. 석주 엄마를 찾아 간 내가 귀 뜀을 해주니 금방 푹신한 요가 한 겹 더 방석 밑으로 깔린다.

 

사라진 것은 다시 올 수 없어서 더욱 그리워 지나보다.

현대식 건물의 예식장에서는 축의금을 받아 적고 뷔페니 하는 이름도 한국적이지 않은 잔치음식을 일인당 얼마라고 하며 대접받는다.

색시의 고운 자태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보다는 축의금 확인과 가슴에 스티커 한 장 붙이고 음식 먹는 일이 더 급해졌다.

떠들썩하게 잔치기분을 낸답시고 소란을 떨다가는 몰상식한 인간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돌아가는 막걸리 잔에 너털웃음 담고 쌓인 앙금을 녹여 풀던 모습들은 모두 옛이야기 책에나 나오게 될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일이다.

간편하고 빠르게 치러지는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더 소중하며 깊은 사람사이 정을 잃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 단 한번만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 내고 들여다보던 옛 재미 훔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