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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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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7 - 여인들


BY 박예천 2008-12-23

여인들

 

 

 

 

 읍내장터와 꽤 떨어진 곳이던 내 고향 마릿골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봇짐장수가 있었다. 그네들은 한결같이 여인들이다. 할머니와의 흥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넓은 대청마루에 물건을 펼쳐놓고 장황한 설명을 하는 모습은 솔직히 과대광고일 때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나일론 월남치마가 기막힌 말솜씨에 고급 실크로 둔갑을 한다. 읍내 오일장에서나 봤을 물건도 말 몇 마디에 물 건너온 수입품이 되기도 했다.

살면서 가끔 그들의 행방이 막연하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연락을 주고받는 집안 어른들도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지사이건만 엉뚱한 호기심은 연달아 꼬리를 물고 늘어난다.

 

 원주 할머니라고 불렀던가. 그 양반은 뭐 특별하게 봇짐이 크지도 않았다. 손가방 달랑 들고 몇 달에 한 번씩 마릿골 무대에 등장한다. 처음엔 할머니의 친구이거나 친척 분 인줄 알았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탁한 저음의 중성적인 목소리로 할머니를 찾는다. 머리 뒷부분에 쪽을 찌지 않았다면 훤칠한 키만 보고 늙수그레한 할아버지라고 어림짐작했을 것이다. 원주 미군부대에서 구해오는 약을 팔러 다닌다. 우리할머니는 그 약을 나병환자 약이라고 했다. 팥알만 한 크기의 흰색 알약인데 아마도 나환자촌에 보내지는 것을 중간에서 빼내오는 모양이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의약품 불법 매매로 감옥직행 감이다. 주된 목적은 약을 파는 일인데 꼭 하룻밤을 묵고 간다. 시시콜콜 우리 집 가정사에 온갖 참견을 다했다. 막걸리 사발이라도 걸치는 날엔 늦은 밤 큰 고모와 말싸움이 이어지기도 했다. 중신을 선다며 대머리총각이나 소개하니 성질 매서운 고모가 난리를 칠만도 하다. 할머니에게 있어 ‘나병환자 약’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종기가 난 부위에 숟가락 뒷면으로 납작 눌러 가루를 만들어 발라주셨다. 누가 아프다는 신음소리만 조그맣게 내 뱉으면 득달같이 사진액자 뒤에 숨겨놓은 만병통치의 나병환자 약을 꺼내온다. 속이 불편한 사람에게 하물며 먹으라고까지 한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지금의 할머니에게 그것은 아직도 만병통치약일까. 그렇기만 하다면 구해드리고 싶다.

 

 기차 철다리가 끝나는 마을에 사는 달석이 어머니도 고무함지 이동상점이다. 주로 비린내 가득한 어물전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 냉장고가 없던 때이니 거의가 소금절인 자반고등어였다. 어쩌다 동태나 물오징어를 내놓기도 했다. 툇마루에 함지를 내려놓는 소리보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먼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륙지방에 살다보니 생선은 보는 일만으로도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할머니의 물건흥정은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고무줄을 늘이고 당기듯 언성을 높이다 보면, 달석이 어머니가 처음 내민 가격보다 한참이나 밑도는 숫자에서 끝나게 된다. 장사수완이 보통이 아닌 그이도 혀를 내두르며 인정한 할머니의 흥정방법이다. 번번이 백기를 들면서도 계속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이문 있는 장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우격다짐도 볼만했지만 마지못해 소리 없이 웃던 그분의 얼굴이 잊혀 지지 않는다.

달석이 어머니는 왼손 검지가 잘려있었다. 솔직히 내 눈엔 생선이 보이지 않았다. 뭉툭하게 잘린 손가락이 내 몸 인양 저리고 측은하게 전해졌다. 이미 통증은 사라지고 군살이 박혔을 텐데 어린 눈에 비추인 것은 아픔이었다.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고된 행상 일도 마다하지 않았음이 동강난 손가락 끝 부분에 죄다 몰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분이었다.

 

 마래리 파리약장수 할머니도 우리 집 툇마루 애용자이다. 말소리가 부정확했고 행색이 남루하여 처음엔 걸인인가 짐작했었다. 몇몇 봇짐장수 중 기억이 가장 흐릿해지는 분이다. 아마도 독한 파리약냄새에 미리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인가 보다.

글쎄 무엇을 넣고 그리 독한 약을 만들었는지 석유냄새가 진동했다. 전기코일 같은 것을 짜서 만든 작은 망태기 안에 파리약이 이 홉 소주 여남은 병 분량 들어있었다. 머릿니가 기어다녀 가려움에 긁적거리면 이 잡는 특효약이라며 세수 대야에 적당량을 풀어 머리를 감기기도 했다. 머리카락 속에 득실거리던 이 떼보다 사람이 먼저 몽롱해져 기절할 만큼 냄새가 극에 달했다. 치아가 없는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던 파리약 할머니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으나 냄새만은 지금도 코끝감각에 남아있다. 그분 또한 약물불법제조 및 판매의 혐의가 있으니 쇠고랑 찰 만한 일을 당시에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 앞에서는 겁도 두려움도 없는 법. 너나 나나 못살던 시절이니 상부상조하는 마음으로 눈감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한 여인네는 우리마을 당골에 사는 땡추어멈이다. 처음엔 그분의 큰아들 이름이 정말로 ‘땡추’인줄 알았다. 마을소식통에 의하면 본명은 따로 있는데 타인과의 대화 중에 고맙다는 표현을 영어로 ‘땡큐!'라 한다는 것이 어눌한 발음이기에 ‘땡추’가 된 것이다. 동네사람들 전부가 아직도 땡추네로 부른다. 부부가 모두 지능이 약간 낮고 셈이 느려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 땡추어멈의 고무함지에는 철마다 종류도 다양한 생선들이 담긴다. 헌데 도매상에서 비싼 값으로 받아오는 모양이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내밀어 할머니에게 혼쭐이 난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워낙에 빈곤한 집인지라 손해를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더러 자반 몇 손씩 사주시는 할머니의 속정을 보기도 했다. 같은 여인네의 처지이고 보니 남편과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고정된 단골 분들 이외에도 지나가다 잠깐씩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봇짐장수들은 할머니에게 있어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다. 같은 처지의 여인네이며 어머니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밥 때가 되어 들어오면 찬밥 술에 김치사발이라도 내밀어야 마음을 놓으신다. 해거름에 봇짐을 들고 오는 사람 앞에서는 숙식제공 여관주인으로 변신한다. 대접을 받는 쪽에서는 고마운 마음에 물건을 싼값에 주기도 했다. 안방윗목에 손님접대용 이부자리 한 채가 펼쳐진다. 밤이 깊도록 주거니 받거니 할머니와 엮으시는 세상이야기를 들었다. 두 귀는 쫑긋 세워두고 잠든 척 윗목에만 신경을 모았다.

세월이 살 같다고 했던가. 어느새 모두 옛일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