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기억력
어젯밤 유뽕이에게 물어봤지요.
“유뽕아! 내일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랑 어디 놀러 갈까? 학원도 안가는 날인데.....”
“네에!”
“그럼, 어디 갈까? 우리 버스타고 놀러 가자!”
“싫어요! 아까 탔어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모두 ‘아까’라고 표현합니다.
“아하! 예전에 1번 버스 타고 놀러갔었지? 또 갈까?”
“싫어요. 버스타기 싫어요!”
그토록 좋아하던 버스를 타기 싫다고 말합니다.
“왜? 대진 가기 싫어? 그럼 다른 데 가볼까?”
“싫어요! 가기 싫어요!”
화요일은 수업이 일찍 끝나고 학원도 쉬는 날이라 아들과 데이트 좀 해보려던 엄마는 적잖이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럼, 우리 피아노학원에 놀러갈까? 변집사님 만나러 가자!”
“네에! 피아노학원 가요!”
어릴 적 다니던 피아노학원엔 가겠다고 합니다.
문득 유뽕이가 버스 타는 일이 왜 싫어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봤지요.
“유뽕아! 우리 언제 버스타고 대진 갔었지?”
솔직히 녀석의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 본 말은 아니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면, 엄마가 대충 알려주려고 생각했지요.
헌데, 유뽕이가 정확한 날짜를 짚어 줍니다.
“2011년 7월 1일에 갔어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제껏 무슨 날짜를 지적하여 맞추거나 기억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버무려 꾸며댄 날짜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또 물어봅니다.
“정말? 2011년에 갔었어? 유뽕인 그때 몇 살이었는데?”
“6학년, 열 세 살!”
맞습니다. 정확한 연도를 말하네요.
엄마는 점점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면...., 그 날이 무슨 요일인데?”
“금요일이요!”
엥? 설마 요일이 맞을까? 엉뚱한 걸 그냥 나오는 대로 말했겠지 싶었습니다.
휴대폰을 들어 날짜검색 해보니 2011년 7월 1일 금요일이 딱 맞습니다.
엄마는 숨이 멎을 지경으로 놀랐지요.
근데, 왜 금요일인 평일에 아들을 데리고 버스나들이를 갔을까 또 궁금해집니다.
참지 못하고 예전 다니던 초등학교 홈페이지를 펼쳐봅니다.
학교행사일정 메뉴를 찾아보다가 엄마는 또 한 번 자빠지게 놀라고 말았지요.
7월 1일은 바로 그 학교 개교기념일이었습니다.
6학년 개교기념일, 집에 있을 유뽕이가 심심할까봐 둘이 버스타고 바닷가 마을로 놀러 갔었습니다.
또렷하게 날짜를 기억해내는 녀석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혹시나 하고 엄마가 질문을 던집니다.
“유뽕아! 버스 타고 가서 뭐했지?”
“엄마한테 혼났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요. 엄마한테 혼나려고 그 멀리 버스타고 갔단 말입니까.
“그래? 엄마한테 왜 혼났는데?”
“유뽕이가 버스에서 막 시끄럽게 해서요!”
아하! 그제야 엄마의 기억 속에도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버스 타거나 공공장소에 가면 혼잣말을 심하게 하던 유뽕이.
아마 그날도 버스 안에서 큰 목소리로 마구 혼잣말을 했을 겁니다.
몇 번 주의 주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느끼며 참고 참다가 아들을 마구 혼냈지요.
목적지에 내려서 녀석이 엉엉 울도록 다그쳤던 엄마였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맛난 것 사주고 산책도 했는데 좋은 건 다 잊었나봅니다.
유뽕이의 기억 속, 버스 타는 일은 곧 엄마에게 혼났던 것뿐입니다.
날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녀석의 능력에 놀랐다기보다, 엄마는 자책의 심정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분풀이하고 성냈던 엄마.
지금껏 그 못된 부분들을 다 겪어냈을 아들 앞에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또 얼마나 아픈 순간들이 유뽕이의 기억 속에 자리했을까요.
엄마는 말없이 아들만 한참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또 다른 상처들을 아들의 머릿속에 남긴 것은 아닌지.
지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은 거라면 차곡차곡 좋은 기억만 쌓아주고 싶네요.
유뽕아,
엄마가 많이 미안해!
2013년 8월 27일
버스타기 싫은 이유를 알게 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