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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102 - 안계시면 오라이!


BY 박예천 2012-12-03

 

안계시면 오라이!



우리 집 거실 벽엔 이미 지난달 말부터 달랑 달력 한 장만 붙어있습니다. 부지런한 달력당번 유뽕이가 미리 넘겨 놓았기 때문이지요.

성탄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녀석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지만, 엄마는 일부러 모른 체 합니다.

목소리가 굵직한 청년 유뽕이는 이제 곧 열다섯 나이가 됩니다.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듯 하늘은 먹빛으로 흐려있네요.

엄마는 실눈을 뜨고 멍하니 쳐다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에휴! 시간만 제 몫을 다하느라 정신없이 달리고 있군!’

정말 그렇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천지가 개벽을 할지라도 시간은 제 역할에 충실하며 흘러만 갑니다. 곧 해넘이에 쓸쓸히 한숨짓다가 다시 떠오를 새해 첫날 희망의 해돋이를 바라보겠지요.


유뽕이의 생각높이는 눈금자로 재어보면 0.00001미리쯤의 수치로 자라고 있습니다.

적어도 엄마의 판단으로 가늠할 때 그렇다는 얘기지요.

언어표현에서도 미세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일어난 유뽕이에게 엄마가 물어봤지요.

“아들! 너 머리감고 갈까?”

“아니요! 머리 뻗쳤어요! 스프레이 뿌려요!”

이 말을 해석하자면, 도깨비 뿔이 된 머리카락은 물 스프레이로 대충 뿌려 빗으로 넘기고 가겠다는 말입니다.

춥고 귀찮으니까 머리도 감지 않겠다는 꾀돌이 녀석의 말이랍니다.

아들의 생각내밀기가 기특해서 엄마는 물기로 머리 뿔(?)을 부숴버리고 곱게 빗어줬지요.


아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세상이 참 흥미롭기만 합니다.

사느라 급급했을 적엔 그런 방향으로 바라보는 일이 힘겨웠던 엄마였어요.

유뽕이만큼은 아니지만, 엄마도 이제 슬슬 아들바보가 되어 같은 즐거움에 빠져버렸답니다.

사물을 볼 때 유뽕이의 시각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았지요.

일부분만 확대해서 보거나, 전체를 축소해서 읽어 내립니다.

일단 저장되면 한참을 그 속에 빠져 지냅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공간속에 등장인물들을 정해놓고 자기만의 세계로 가지요.


요즘 녀석은 버스놀이에 한참 몰두해있습니다.

거리를 달리는 버스만 봐도 흥분이 되는지 마구 중얼거립니다.

“우와! 저기 봐요. 동해상사 55번 버스예요. 어? 저건 강원여객이네? 동부익스프레스다!”

아주 먼 거리에서 버스 색깔이나 디자인만 봐도 척척 맞춥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다들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유뽕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힘을 줍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화장실문을 활짝 열어놓고 일을 보기에 엄마가 단단히 연습 시켰지요. 하나하나 오랜 시간 알려줘야 일상생활 훈련이 가능한 유뽕입니다.

일단 익히고 나면 계속 기억하고 행하는 좋은 점도 있지요.

요즘 녀석은 새로운 재밋거리 하나를 엄마에게 제공합니다.

화장실에서 큰 볼일(?)로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문을 여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치지요.

“김ㅇㅇ선생님, 박ㅇㅇ이모! 어서 오세요, 안계시면 오라이!”

거실에 있던 엄마와 아빠, 누나는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답니다. 휴지를 가져다 달라는 소린 줄 알았지요.

헌데, 녀석이 화장실 변기에만 앉으면 중간에 문을 벌컥 열고 소리치는 거예요.

날마다 승객이름을 바꿔가며 화장실버스(?)에 승차시킵니다.

괘씸한 녀석이 한 번도 엄마이름을 부르지 않네요.

아마 녀석의 생각 본부에서 화장실 한 칸을 버스 실내로 정해버렸나 봅니다.

자기가 맘에 드는 승객들을 볼 일 보는 순간마다 호명해서 승차시키고 있습니다.


“쟤 좀 봐요. 아무래도 화장실이 버스라고 생각하나봐! 지금 변기에 앉은 운전기사가 승객 태우는 거야! 흐흐흐..”

엄마는 아빠에게 설명을 해주며 배꼽 쥐고 웃습니다.

하여간 기발한 녀석이지요.

어느 날은 우리 집 창문을 전부 버스 유리창이라며 세차하느라 고생하더니 말입니다.

대걸레를 들고 어찌나 열심히 닦던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지난겨울입니다.


유뽕이 장난에 장단 맞추기 전문요원들인 엄마와 아빠는 녀석보다 더 크게 손님을 모읍니다.

변기에 앉아 열중하던 녀석의 화장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으면, 거실에 있던 나머지 가족들이 먼저 소리 지릅니다.

“......., 안계시면 오라이!”

자기 몫의 외침을 엄마와 아빠가 선수 치는 바람에 황당하게 놀라는 유뽕이 표정이 더 재미있답니다.


‘안계시면 오라이!’

근데, 녀석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왔을까요?

친구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인지, 티브이에서 봤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재밌는 상상으로 연결한 유뽕입니다.

혹시....., 엄마가 장난치며 개그맨 흉내 낸 걸 따라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여러분! 이제부터 꼭 숙지하셔야 됩니다.

유뽕이의 화장실버스는 절대 손님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무조건 빨리 승차해야 하니 서둘러 주십시오.

정류장에 타실 분이 한 분도 없다면 유뽕기사가 큰 소리로 외칠 겁니다.

이렇게요.

안계시면 오라이!




2012년 12월 3일

유뽕이 전용 버스(화장실)를 쳐다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