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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96 - 의좋은 남매


BY 박예천 2012-10-10

 

의좋은 남매



주말이 되면 엄마와 아빠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답니다.

금화정 밭에 가을걷이하러 가야하기 때문이지요.

토요일부터 콩 베기를 시작했습니다.

샛노랗게 익은 콩알들이 꼬투리 박차고 사방으로 튀어나올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콩대가 더 바싹 마르기전에 베어 비닐멍석을 깔고 세모꼴로 잘 쌓아 놓아야 합니다.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유뽕이는 밭에 가기 싫어합니다.

옷이 땀에 흠뻑 젖도록 자전거 타기를 즐겨하더니, 밭에 가면 컨테이너 옆에 쪼그려 앉아 흙장난하거나 엄마를 향해 떼쓰기만 하지요.

이장님 댁 축사에서 울려오는 소떼들의 울음소리라도 들려오는 날이면, 내내 불안감 감추지 못하고 엄마를 들볶습니다.

소 울음소리를 따라하라는 둥, 의미 없는 말만 되풀이 해대며 징징 울기까지 합니다.


콩 베러 나가면서 엄마가 물어봅니다.

“유뽕아! 밭에 같이 갈까?”

“싫어요!”

“그럼 집에서 뭐 하고 있을 거야?”

“컴퓨터 할 거예요!”

몇 번을 물어봐도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선뽕이 누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후, 남매만 남겨놓고 밭으로 갔지요.

“선뽕아! 유뽕이 가스 불 켜나 잘 지켜보고, 잘 데리고 있어. 먹고 싶은 거 냉장고에 있으니까 꺼내먹고 알았지?”

녹음기처럼 되풀이되는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누나는 노트북만 쳐다보며 대충 답을 합니다.

“알았어! 걱정 말고 다녀오기나 하셔!”


마실 물 몇 병만 싸들고 점심때가 지나서야 엄마와 아빠가 콩밭에 들어섰습니다.

너른 황금들판마다 탈곡이 한참입니다.

콤바인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거리고 코끝엔 구수한 볏짚냄새가 들락날락합니다.

콩대 베던 아빠도, 꼭꼭 단을 묶어세우던 엄마도 허리 펴며 쉬다가도 앞으로 펼쳐지는 추수 풍경에 넋이 빠질 지경입니다.

“아! 진짜 볏짚 냄새 기가 막힌다.”

아빠가 먼 들판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합니다.

시인이 별거 인가요. 아름답게 보고 느끼며 표현 할 줄 알면 되는 겁니다.

처음 짓는 농사지만 재미가 쏠쏠합니다.

한 개의 콩알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자라면서 다닥다닥 콩깍지가 달리다니요.

몇 배의 수확인지 모릅니다.

중간에 풀 뽑아 주는 일에도 게으름을 피웠고, 비료도 농약도 주지 않았는데 저 혼자서 잘 자라주었네요.

엄마는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책에서 알아낸 지식보다 더 많은 진리를 농사에서 배운다고요.


설악산 울산바위 쪽으로 짧았던 가을 해가 기울어 갑니다.

갑자기 하늘이 먹빛이 되는가 싶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네요.

일하던 목장갑 벗고 엄마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듭니다.

“선뽕아! 여기 비가 온다. 엄마가 마당에 빨래 널어 놨거든. 좀 걷어 줄래?”

“여긴 비 안 오는데?”

“그래도 지금 걷어야 할 시간이니까 거실에 놓아 줘!”

“응. 알았어!”

전화기 너머 선뽕이 목소리에 귀찮은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거미나 벌레들이 많아서 마당에 나가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거든요.


토요일 콩 베는 일은 이만 접어야겠습니다. 해가 짧아져 금세 사방이 어둑해졌네요.

양손에 장갑 끼고 콩 단 매듭짓는 일이 둔하기에, 왼손은 벗고 작업해서인지 엄마 손등이 여기저기 긁혀 쓰라립니다. 아빠도 낫질한 손목이 뻐근하다고 말하네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꼬질꼬질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다가 집에 두고 온 남매 얘기를 합니다.

“빨래는 잘 걷었을까? 분명 저번처럼 구석에 있는 건조대 속옷들은 그냥 뒀을 거야. 선뽕인 덜렁이라서....!”

“설마? 아닐 거야. 내가 당부를 몇 번이나 했는데 뭘”

그래도 엄마는 딸을 믿어보겠다는 말투였지요.



집에 돌아오니 빗방울이 더욱 거세집니다.

거실 구석 빨래가 쌓여있고 차분한 분위기네요.

엄마는 부랴부랴 저녁밥 하기위해 부엌으로 가고, 아빠는 마당에 비설거지 하러 나갑니다.

잠시 후, 아빠가 큰 소리로 마당쪽문으로 들어서며 외칩니다.

“여보, 여보! 이것 좀 봐. 내가 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구!”

뭔가 거대한 일을 발견한 것 마냥 큰소리 뻥뻥 칩니다.

아빠가 손에 가득 들고 있는 것은, 선뽕이와 엄마 속옷, 행주 등등...., 작은 빨래들이었습니다. 빗물이 스며들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요.

장하다 선뽕이!


그래도 젖은 것이 속옷뿐이라서 다행이라며 선뽕이를 격려했습니다.

“너 혼자 빨래 다 걷었어? 잘 했는데....,항상 장독대 쪽 건조대 좀 확인해라 제발!”
“아니, 유뽕이 시켜서 같이 했어.”

엄마는 선뽕누나 대답에 뒤로 꽈당 넘어질 뻔 했습니다.

자기 졸개라고 엄마, 아빠 없는 사이에 유뽕이를 부려먹은 것입니다.

걷으면서 먼지도 탈탈 털어내야 하는데, 녀석이 그걸 알았을 리가 없지요.


젖은 빨래는 다시 빨면 되지요.

엄마는 녀석들이 참 대견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느새 다 커서 둘만의 오후시간을 보냈으니까요.

두고 나가면 불안해서 몇 분을 못 버티고 들어오거나 꼭 껌처럼 붙이고 다녀야 했던 유뽕이였는데 말이죠.

평소엔 퉁명스런 누나도 유뽕이랑 단 둘이 있으면 잘 챙겨주나 봅니다.

서로 할 일도 나눠서 하고요.

이다음에, 엄마나 아빠가 아주 많이 늙어져 세상을 먼저 떠나고 난 뒤에도 오늘처럼 의좋은 남매로 남아있었으면 합니다.

 


        (유뽕이 5학년 때 찍은 남매사진 입니다^^)

 

 


보글보글 찌개냄새 따라 피어오르는 뜨끈한 김을 손가락으로 찍어 엄마가 허공에 글씨를 써 둡니다.

‘사랑한다, 내 새끼들!’





2012년 10월 6일

남매만 두고 콩밭에 갔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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