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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89 - 이담에 커서


BY 박예천 2011-12-14

 

           이담에 커서

 

 

 

담임선생님이 알림장에 편지를 적어 보내셨습니다.

학교문집에 글을 실어야 하는데 유뽕이 것이 없으니,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평소에 그린 그림으로 대신하겠다는 내용이네요.

종이 한 장에 채워야 할 게 많습니다.

이름으로 삼행시도 지어야하고, 읽은 책속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습니다.

조목조목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도 채워야하고, 정말 엄마 숙제가 많습니다.

끙끙거리며 엄마는 머리를 굴려봅니다.

녀석의 생각을 모르니 전부 추측과 상상이지요.

눈높이를 최대한 낮춰 엄마는 잠시 유뽕이가 되어봅니다.

앉은뱅이 상을 펼쳐놓고 유뽕이에게 연필을 쥐어주고는 입으로 불러주며 쓰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복사용지 분량 종이 앞뒷면을 다 써 내려갔습니다.

 

거의 마무리 하려는데, 새로운 글제가 보이네요.

순간, 엄마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쩔쩔매고 말았습니다.

‘20년 뒤에 나에게 쓰는 글’이랍니다.

고민하다가 그냥 유뽕이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유뽕아! 너 이담에 커서 뭐가 될 거야?”

예전에 엄마 아빠가 알려준‘건강한 아빠’가 되겠다는 말을 의미 없이 대답 할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전혀 새로운 말을 합니다.

“의사 될 거예요!”

하긴, 이번에 처음 한 말은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묻기만 하면 의사가 되겠다고 하네요.

소아과의사를 해보겠다고 말하는 날도 있고, 정형외과의사가 되겠다고 즉석에서 바꾸기도 합니다.

다시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 의사가 되겠다기에 그대로 불러주며 적게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오늘은 마음이 아픈 어린이가 우리병원에 왔다. 예전에 나도 놀이치료, 감각치료, 인지치료를 받았었다. 엄마가 매일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하셨다. 말로 하고 싶어도 표현이 되지 않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장애라고 했는데 사랑으로 치료하면 낫는 병이었다. 지금 내 앞에 온 아이도 꼭 낫게 해 줄 거다. 사랑보다 귀한 치료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불러주고 녀석이 옮겨 썼지만 기가 막힌 내용이었어요.

꿈에 불과할지라도 정말 행복한 상상이었습니다.

 

 

오늘 저녁식탁에 앉아 네 식구 밥을 먹으며 즐거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지요.

재미있는 표정으로 엄마가 아빠에게 얘기를 합니다.

“자갸! 울 유뽕이 이담에 커서 의사가 된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선뽕이 누나는 장래희망도 정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데 유뽕이 꿈 먼저 말하니 아빠는 웃기만 합니다.

가만히 건너편에 앉아있는 녀석을 향해 근엄하고 차분하게 얘기합니다.

“야, 임마! 너 의사 되려면 수능을 아주 잘 봐야 돼! 그리고 성적이 상위 3%안에 들어야 된단 말이야 짜식아! 알겠어?”

아빠는 아들이 자기반 학생이라도 된 양 일부러 웃기는 것이지요.

옆에서 듣던 누나와 엄마는 키득키득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립니다.

뜻도 모르는 유뽕이는 그저 씩씩하게 대답만 합니다.

“네!”

 

다 먹은 식탁을 치우려는데, 선뽕누나가 아직 의자에 앉은 채 재잘거립니다.

“엄마, 엄마! 나 결정했어. 유뽕이가 의사하니까 그냥 간호사는 내가 할게”

아주 크게 봐준다는 식으로 농담을 합니다.

허무맹랑한 유뽕이의 꿈 이야기 하나에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우리가족은 소리 내어 웃느라 시끄러웠답니다.

하여간 녀석 때문에 울다가 웃고, 기복심한 날들이네요.

 

그나저나 정말 궁금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낸 글을 받아 본 선생님의 표정이 어땠을까 하는 것과, 이담에 커서 유뽕이가 의사가 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이십년 뒤에나 결과를 알 수 있으니, 아직은 기다려봐야겠지요?

 

 

2011년 12월 14일

유뽕이 의사되는 이야기하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