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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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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82 - 나는 괴물이다!


BY 박예천 2011-10-07

 

        나는 괴물이다!

 

 

 

유뽕이 눈높이에서 장단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역할 중 상당부분을 엄마가 담당하기 때문에 가끔 황당한 일이 생기지요.

완벽주의자라 자타가 공인할 만큼 똑똑(?)했던 엄마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요즘 따라 실수가 잦네요.

건망증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이젠 가족들도 일상이려니 합니다.

혀가 꼬이는지 단어들이 입 밖으로 나올 때는 전혀 엉뚱한 뜻으로 발사됩니다.

놀림거리 하나 걸려들었구나 싶은지 엄마의 실언을 그냥 넘어가지 않지요.

박장대소하거나 마구 비웃는답니다.

 

유뽕이와 말하거나 놀이할 때는 딱 녀석 수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치 유치원아이들 대하듯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장난스런 놀이도 신나게 즐겨줘야 좋아하지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서도 서슴지 않고 아들과 어깨동무를 한답니다.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폴짝거리며 걷다가 아무 땅바닥이거나 쪼그려 앉으며 깔깔 웃는 모자(母子).

엄마의 과장된 음성이나 행동에 더욱 해맑게 웃는 유뽕이 녀석.

그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어 엄마는 자주 망가져도 창피한 줄을 모르는 아줌마가 되어갑니다.

 

가끔은 녀석과의 놀이와 현실을 혼동하는 적이 많습니다.

엉덩이 찔러대는 ‘똥침 놀이’를 유뽕이와 번갈아가며 하다가, 실제로 엄숙한 자리에서 다른 어른의 엉덩이에 손가락 세워 대는 적도 있고요.

유뽕이와 엄마만의 암호처럼 사용하는 엉터리 호칭을 불쑥 다른 사람을 향해 부르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둘이서 즐겨하는 놀이는 일명 ‘귀신놀이’입니다.

두 손은 얼굴 옆에 갈퀴모양으로 세워들고 살금살금 걸어가며 엄마를 무섭게 하려는 속셈인지 다가옵니다.

“으허엉! 나는 귀신이다! 엄마를 잡아먹겠다!”

이 부분에서는 최대한 바들바들 떨며 놀라고 겁나는 척 연기를 실감나게 해야 합니다.

“으악! 살려줘요! 귀신 무서워. 도망가자!”

이방에서 저 방으로,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난리굿을 피웁니다.

단순한 놀이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유뽕이는 숨이 넘어가게 웃습니다.

이번엔 엄마 쪽에서 귀신이 됩니다.

“나는 배 뚱뚱한 유뽕이만 잡아먹는 귀신이다. 이히히히히! 네 이놈 이리 왓!”

까르륵 웃으며 도망가다 막다른 방향 엄마 방 침대에 쓰러집니다.

넘어진 유뽕이 목을 조르고 끌어안으며 최악의 약점인 곳만 골라 간지럽게 하지요.

“엄마! 살려주세요. 으헤헤헤, 사람 살려!”

적절한 상황에 맞는 말만 골라서 소리 지릅니다.

 

엊그제부터 유뽕이는 자신이 괴물이랍니다.

엄마얼굴만 마주치면 “으헝! 나는 괴물이다!”라며 달려옵니다.

녀석에게 질세라 살려달라고만 하지 않고, 입을 크게 벌리며 용감하게 대항하는 엄마괴물입니다.

“나도 괴물이다. 내가 더 무섭지? 우헤헤헤!”

누나와 아빠는 잘들 논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쳐다봅니다.

 

오후에 피아노학원가는 길.

상가 옆에 차를 세우고 유뽕이 먼저 들어가라 했지요.

자동차 잠금장치를 확인하느라 엄마는 좀 늦게 학원 건물로 향했습니다.

계단 몇 개를 오른 뒤 한 바퀴 돌아가는 복도모퉁이쯤에 이르렀을 때, 굵은 남자 음성이 들려왔지요. 꼭 변성기지난 유뽕이 목소리였습니다.

앞서가던 녀석이 엄마모습 보이지 않자 혼잣말하며 다시 되돌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난기 발동한 엄마는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숙이며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유뽕이 발자국과 중얼대는 특유의 목소리.

이때다 싶어 엄마는 비장의 무기를 내 쏩니다.

얼굴 전체를 공포영화 주인공의 표정으로 일그러뜨리고, 입은 침을 질질 흘리는 모양처럼 삐뚤게 벌려야 합니다.

눈가에 있는 대로 잔주름을 접고 째려보는 상태로 말입니다.

괴성을 내 지르듯 핏대 세운 목소리로 양 손은 얼굴 옆에 대고 오그라들게 만들며 내는 말.

“으허엉! 우헤헤헤.....이히히히! 나는 괴물이다!!! 널 잡아먹겠다!”

얼굴 찡그리느라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해서 앞을 볼 수 없었지요.

 

근데, 참 이상합니다. 반응이 없네요.

서서히 눈을 떠 본 순간.

엄마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답니다.

피아노학원 옆 사무실 아저씨 두 분이 업무 보러 내려오던 중이었지요.

뭐 이런 정신 나간 아줌마가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엄마를 어이없게 쳐다보더군요.

아!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유뽕이 녀석은 피아노 건반 둥당거리고 있는데, 엄마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즐겁기만 합니다.

피아노선생님께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니 웃느라 배를 움켜쥐고 있네요.

 

이대로 가다가는 몇 년 뒤, 엄마가 진짜괴물로 변해버릴 것만 같습니다.

유뽕이 수준에 맞춰 사는 하루하루가 모험입니다.

 

집에 돌아와 파자마로 갈아입자마자 또 양손을 오그리는 유뽕이.

“우헤헤헤......, 나는 괴물이다! 엄마 잡으러 간다!”

 

 

 

 

2011년 10월 7일

아들과 괴물놀이하다 황당했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