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좋은 부자(父子)
언제부터인가 유뽕이 머리를 감겨준 후, 드라이어로 말리다보면 엄마는 팔이 아픕니다.
나이가 먹어 늙어가는 증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네요.
녀석의 키가 엄마보다 훌쩍 커버려 눈높이가 맞지 않는 겁니다.
두 손 높이 들고 벌서는 자세로 유뽕이 머리손질을 해줍니다.
발 크기가 아빠랑 똑같아졌습니다.
마당으로 나갈 땐, 아빠와 슬리퍼를 번갈아 가며 나눠 신기도 합니다.
티셔츠 사이즈도 아빠랑 같은 걸 두 장 사면 커플로 맞춰 입은 것 같지요.
변성기가 찾아 왔는지 목소리도 점점 굵어집니다.
자세히 보니 코밑도 거뭇하게 수염자리가 보입니다.
천날 만날 엄마의 애기로만 안아주고 업어주며 보살피고 싶은데, 어느새 겉모양이 어른으로 자라버린 유뽕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입던 옷을 세탁기에 집어던지고 꼭 내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봄이 다가도록 쌀쌀한 기온이라 내복도 당연하다 하겠지만 보기에 영 좋지만은 않네요.
티브이 개그프로그램에 나오는 발레리노 복장처럼 남성의 거시기가 도드라져 보이니까요.
다른 추리닝을 권해 봐도 싫다고 난리입니다.
엄마차를 세차하겠다고 내복바람으로 골목길에 나선 날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덜미 잡아 데려왔지요.
공원길 사람들이 지나다가 보면 풍기문란으로 고발하지 않겠어요?
하여튼 이래저래 한 옷만 고집하는 유뽕이의 내복사랑이 끝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난 주말엔 작아진 내복과 달랑 한 개 남은 것도 빨랫줄에 걸려있어 당장 입을 게 없더군요.
아빠 옷장을 뒤지다 평상복 겸 입는 개량한복이 눈에 띄기에 유뽕이에게 입혔습니다.
워낙에 출중한 인물(?)인지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아빠보다 오만(50,000) 배 더 낫게 보였습니다.
마침 아빠도 카키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뽕이까지 입히고 보니 못난이 형제 같았어요.
지켜보다가 엄마는 주저앉아서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답니다.
비슷한 두 남자가 하루 종일 마당과 거실에서, 혹은 옥상과 계단사이로 훅훅 나타납니다.
선뽕이 누나는 소리를 꽥 지릅니다.
“엄마! 유뽕이 한복 제발 벗겨! 저게 뭐야? 잘 생긴 얼굴을 다 망치구!”
“뭐가 어때! 멋있지 않니? 내일 교회에도 저러고 갈까 하는데.”
“엄마.., 진짜 왜 그래? 밖에는 입혀서 내보내지 마. 제발!”
동생의 스타일이 구겨지기라도 하는지 통사정을 합니다.
옥상에 넓은 화단 근사하게 꾸며보겠다고 아빠가 벽돌 육백 장을 주문했습니다.
트럭이 쏟아놓고 간 회색 작은 블록이 대문 앞에 수북합니다.
도와주겠다고 나간 엄마 등을 떠밀며 아빠는 혼자서 열장씩 나릅니다.
이마에 구슬땀 흘리며 옥상 계단을 오르내리네요.
헉헉 거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운 센 천하장사 아들을 불러냅니다.
“유뽕아! 이리 와봐. 아빠 좀 도와 주라!
“네!”
시원스레 대답하고 나간 유뽕이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벽돌을 나릅니다.
아빠는 열 장, 유뽕이는 다섯 장씩 영차, 영차 힘을 냅니다.
새참이라도 준비해야겠다는 맘으로 엄마는 고소한 해물 동그랑땡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선뽕이 누나가 갑자기 까르르 웃습니다.
“엄마, 되게 웃겨! 아빠랑 유뽕이 꼭 마당쇠들 같어!”
숨넘어가게 웃는 딸의 말을 듣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봅니다.
단체복이라도 입은 것처럼 거의 비슷한 남자 둘이서 오가며 벽돌을 들고 낑낑 댑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엄마도 그만 배꼽 움켜쥔 채 쓰러지고 말았네요.
일이 끝났는지 땀범벅이 된 두 남자가 들어옵니다.
“히야! 유뽕이 녀석 대단해. 아마 혼자서 백장은 날랐을 거야!”
힘센 아들이 기특한지 아빠 목소리가 빳빳합니다.
먼지 묻은 단체복(?)을 빨래 통에 집어넣고 두 남자는 동시에 벌거숭이로 변신합니다.
욕실에서 샤워하느라 콧노래도 들리고, 꺅꺅 비명소리가 새어나오기도 합니다.
눈꼴시어 못 봐 줄 정도로 부자(父子)간 나체로 벌이는 애정행각의 정도가 심하네요.
말끔해진 얼굴로 식탁 앞에 나타난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새참을 먹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아들 입속으로 먹이를 날라주는 아빠새 한 마리 같네요.
엄마밖에 모르던 유뽕군이 점점 아빠편으로 돌변해갑니다.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던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네요.
참으로 서글프고 서글퍼서.....,
이제부터라도 엄마는 선뽕이 누나 앞에서 알랑방귀나 뀌어야겠습니다.
2011년 6월 2일
애정에 들끓는 부자(父子)를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