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처방전
피아노학원 구석 앉은뱅이 테이블에 앉아 뭔가 열심히 그립니다.
녀석의 전용 낙서장이 있어 심심하면 연필을 잡습니다.
선생님 책상 옆에 앉아 엄마는 읽던 책에 몰두하고 있었지요.
다 그렸는지 종이 한 장을 엄마 눈앞에 말없이 들이밀고 쳐다보랍니다.
“어? 이거 사람 얼굴이네.”
정말 16절 백지위에 동그란 사람얼굴이 여덟 개나 있습니다.
각각의 표정이 다른 모습이네요.
“유뽕아! 이 얼굴들 이름 좀 연필로 써 줄래?”
책 읽던 시간 방해받기 싫어 녀석에게 일부러 숙제(?)를 내줍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녀석은 정성들여 얼굴마다 제목을 쓰는지 열중합니다.
엄마에게 건네준 종잇장에는 이름 붙여진 얼굴들이 네 개씩 두 줄로 그려져 있습니다.
‘즐겁다, 기쁘다, 화나다, 덥다, 한숨 쉬다’ 등등.
한숨 쉬는 얼굴은 오므린 입술이 삐죽이 나와 있고 그 앞에 공기 빠지는 듯 구름표시도 있습니다.
입에서 김이 새어나오는 특징을 살린 것인가 봅니다.
덥다는 얼굴 이마 옆엔 굵은 땀방울 한 개가 주먹만 하게 달려 있고요.
각 얼굴마다 의미를 잘 살려 그렸습니다.
“와! 잘 그렸네. 근데, 여기 유뽕이 얼굴은 어디 있어?”
“기쁘다!”
동그라미 속에 눈 가느다랗게 꼬부라진 스마일표시 얼굴을 손으로 가리킵니다.
하회탈을 닮았는지 얼굴가득 기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것이 자기 얼굴이랍니다.
궁금한 마음에 또 물었지요.
“음....,그러면 엄마 얼굴은 어떤 거야?”
솔직히 조금 떨리고 자신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요즘 엄마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 녀석에겐 빵점이거든요.
“즐겁다!”
유뽕이가 선택해준 엄마 얼굴은 눈에 힘이 들어가도록 동그랗게 떠있고 입은 헤벌어진 모양이었습니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입니다.
아마도 엄마에게 날마다 즐겁게 지내달라는 요구사항이 섞였을 겁니다.
속으로 많이 미안해졌습니다.
뉘엿뉘엿 설악산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집으로 왔습니다.
엄마는 저녁쌀 안쳐놓고 잘 마른 빨래를 개고 있었지요.
거실의자에 앉아있던 녀석이 갑자기 자기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곤 말합니다.
“아! 머리야. 머리 아퍼!”
“뭐라고? 많이 아프니? 어떡하지....,”
걱정하는 엄마 얼굴빛을 살피더니 한마디 툭 내뱉는 유뽕군.
“밴드 붙여요!”
“엥? 밴드? 어디에 붙여?”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진지하게 물었답니다.
녀석은 태연하고 침착하게 대답합니다.
“여기요. 이마에 밴드 붙여요!”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이 즉석 처방전을 알려줍니다.
참 간단하고도 편리한 치료방법이네요.
녀석의 말이 우습기도 하고 기발한 생각인지라 대견해 꼭 안아줬습니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뽀뽀세례를 퍼부으며 엄마는 또 물어봅니다.
“유뽕아! 엄마는 마음이 아픈데 어쩌지?”
“밴드 붙여요!”
아무리 만병통치약이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돌팔이 시술법입니다.
“엉? 밴드 붙이라고? 어디에 붙이지? 마음이 이 만큼 아픈데?”
과장을 섞어 양 팔 커다랗게 벌리며 많이 아픈 척 했습니다.
녀석은 심각하지도 않은 당연한 태도로 엉터리 처방을 해줍니다.
“여기요! 가슴에 밴드 붙여요!”
볼록한 엄마 젖가슴을 이때다 싶었는지 집게손가락으로 마구 쿡쿡 찌르며, 일회용 밴드 붙이라고 강력히 외칩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요절복통하고 말았답니다.
유뽕이 처럼 단순하고 쉽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즐겁고 기쁜 얼굴로만 더불어 살며,
가슴이 아픈 일에도 밴드 하나로 치료되는 세상.
유뽕식 밴드처방전에 기막힌 효능이 있다면,
여기저기 광고할까 합니다.
명의 허준네 대문 앞에 줄줄이 늘어선 모양대로,
유뽕이네 마당 있는 집에도 아픈 사람들 넘치게 찾아온다면
밴드 하나씩 붙여주겠습니다.
시린 가슴에도,
끓는 열병에도,
저린 통증에도.....,
딱 하나만 붙여도 낫는다면 말이지요.
일회용밴드 비용쯤이야 기막힌 처방전 개발한 아들 둔 유뽕엄마가 내지요.
내일 당장 몇 상자 들여놔야겠네요.
2010년 9월 28일
돌팔이처방전으로 치료중인 엄마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