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길이와 엄지
아직 친구들과 놀이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유뽕이는 늘 혼자입니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빼앗지도, 좋아하는 친구이름을 부를 줄도 모릅니다.
교실구석에 앉아있거나 선생님만 졸졸 따라다니지요.
유뽕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엄마는 수다쟁이가 됩니다.
“오늘은 누구하고 놀았어?”
“친구이름은 뭐야?”
“간식은 뭘 먹었니?”
열 번을 물어도 엄마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는 녀석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묻습니다.
"유뽕아! 말해봐 친구이름이 뭐야?”
“기린 반!”
사람이름을 기대했던 엄마에게 대뜸 자기반 이름을 말해줍니다.
아무래도 유뽕이의 친구 만들기는 오랜 시간이 걸릴듯합니다.
유치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면 엄마는 유뽕이를 데리고 어디든 갑니다.
생선비린내 가득한 중앙시장골목을 걸어보기도 하고,
노란 시내버스타고 설악산에도 갑니다.
손을 잡고 걷거나 버스 안에서도 유뽕이 엄마 입은 쉬지 않고 중얼거립니다.
“저기, 바다네. 바다야 안녕?”
유뽕이는 버스창문 밖을 내다볼 뿐 아무 말이 없습니다.
“유뽕아! 갈매기 봐라. 갈매기야! 어디 가니? 나는 버스 탔다.”
엄마니까 알 수 있지요.
말은 하지 못해도 분명히 듣고 있다는 것을.
들에 꽃이나 나무들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얘기를 걸어봅니다.
“노란 잎이네. 이건 은행잎이야. 저기 장미꽃도 있다! 얘들아 안녕?”
그러고 보니 유뽕이의 친구는 유치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네요.
엄마는 잠시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상처 주는 말도 하지만,
바다, 갈매기, 나무, 꽃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더 익숙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유뽕이의 친구들은 정말 많습니다.
가을바람이 간지러운지 강아지풀들은 나란히 누워 한들거립니다.
한 개를 뽑아들고 유뽕이 목에 살살 문질러봅니다.
“아이, 간질려워.....간질려워”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간지럽다는 표현을 합니다.
금세 강아지풀은 유뽕이의 새 친구가 되었지요.
놀이터 앞 잔디밭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유뽕이가 또 달려갑니다.
무엇을 발견한 걸까요?
따라 가보니 막대사탕마냥 기다란 민들레 홀씨대롱을 꺾어듭니다.
입가에 대고 후후 불어보기 시작합니다.
하얀 홀씨가루들이 유뽕이 입 바람에 밀려 사방으로 흩날립니다.
어느새 두 번째 친구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기린 반에서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생깁니다.
어느 날, 아빠도 유뽕이에게 새 친구를 선물하셨지요.
눈이 동그랗고 기다란 두 귀가 아래로 내려온 복스러운 친구였어요.
등 쪽에 얼룩무늬 털옷을 입은 예쁜 강아지였습니다.
이름을 ‘엄지’로 지어놓고 보니 더욱 친구 같았지요.
틈만 나면 유뽕이는 엄지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줍니다.
자기가 먹던 간식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눠주지요.
설거지를 하던 엄마의 귓가에 유뽕이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엄지야! 허리 돌리기, 골반 틀어주기, 가위뛰기 해봐. 하나, 두울, 세엣.....”
체육관에서 배운 체조를 엄지에게 시킵니다.
유치원친구보다는 덜 부끄러운지 자꾸 말을 걸지요.
이제 신이난건 유뽕이 보다 엄마입니다.
엄마는 물뿌리개를 쥐어주며 물주는 일도 시킵니다.
“유뽕아! 꽃 물먹어라 해야지.”
화초친구까지 만들어주려는 욕심이 또 늘어만 갑니다.
칭찬해주니 유뽕이는 아무 때나 물을 퍼붓습니다.
“물 먹어!”
그래서 베란다에는 매일 물이 마를 새가 없지요.
아파트 화단에 단풍잎들이 빨간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던 날.
아빠는 한꺼번에 새로운 친구 여럿을 데려오셨지요.
낚시터에서 잡아오신 물고기는 열 마리가 넘었으니까요.
수족관을 닦고 손수 수초도 심어주십니다.
거실창문 옆에 근사한 물고기네 집이 생깁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뽕이 누나가 아빠께 여쭤봅니다.
“아빠, 이 물고기 이름은 뭐야?”
“어....블루길이야.”
“그럼, 성씨는 ‘블’이고 이름은 ‘루길’이네?”
“뭐라고? 하하하 그래 맞다 루길이! 그렇게 부르자.”
이렇게 해서 엄마에게는 먹이 챙겨줘야 할 가족이 늘었고,
유뽕이는 함께 이야기 나눌 친구 루길이가 생겼답니다.
다음날아침, 늦잠을 잔 유뽕이가 부스스한 머리모양을 하고 눈을 비비며 수족관 앞으로 갑니다.
멀찌감치 지켜보던 엄마는 조바심부터 났지요.
예전처럼 고기 잡겠다며 물속에 손을 집어넣어 휘젓고 난리법석이 날 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살며시 어항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던 유뽕이가 물고기에게 속삭입니다.
“물고기야, 뽀뽀!”
작은 입술을 유리에 붙이고 비벼댑니다.
샘이 나는지 현관문 앞에 있던 엄지도 유뽕이 곁으로 달려갑니다.
지켜보던 엄마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오며 가슴에는 모락모락 따스함이 밀려옵니다.
루길이와 엄지의 아침밥상은 친구 유뽕이덕분에 진수성찬이 되겠지요?
2005년 10월 28일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