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려고 하고 있다.
아침마다 뜨는 해는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니던가..?
나 또한 어제의 연속일 뿐인데...
세상은 시간에 민감하다.
조금만 지루해도 참아주질 못한다.
나 또한 그와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었으면하는 조급증이 생겼다 .
마음 불편하고 걷기도 어색한 날은 누군가 어깨만 부딪혀도 시비를 붙고싶은 마음이 드는것처럼
한 공간에서 있으면서 보이지 않은 벽으로 둘러쳐진 그의 유리벽 속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싶었다.
누가 뭐라해도 내 감정에 편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되지 않고...
싸래기 햇살에도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에서인지 화실은 늘 캄캄한 굴 속 같았다.
그 어두움의 을씨년과 불편함이 싫은 학생들 몇이 월동준비를 하는 겨울 동물처럼 자취를 감추고 나니 화실의 공기는 더 싸해졌다.
늘 구석에서 한곳만 보고 작업을 하는 그가 가끔씩 응시했던 문이 잘보이는 명당에서
붓을 놓거나 반가움에 연필을 떨구거나 하는 날은 그의 애인, 나의 은사가 오는날이었다.
한눈에도 아담한 그의 애인은 가녀리고 하얗다.
입시학원동기였던 단짝이 하나는 교사가 되고, 하나는 미술입시 학원 선생이 되었다.
지인이면서 불가분의 관계였던 두사람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자주 만남을 가졌었는데 혹 남들의 시선이 불편하다 느껴질 쯤은 선심 쓰듯 나를 끼워주곤했다.
이미 한남자의 아내이자 한아이의 엄마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과 청순함이 매력이었던 그녀는 내게 넘기 힘든 산과도 같았다.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질투의 대상이기도 한 나의 롤 모델이 바로 화실 주인장의 오래된 연인이었다.
그냥 내가 무관심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내가 눈치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편했을까...
눈이 왔다.
첫눈이라는데 그해엔 하늘이 뚫린듯 내리는 통에 눈이 소복히 쌓이고 있었다.
3층 화실 창 너머로 걸린 전봇대 가로등이 쏟아져 내리는 눈의 양을 확인하고는 그냥 앉아있을 수 없는 마음에 당장 뛰쳐나가 연신 눈싸움을 하고 볼이 발갛게 상기된 여흥을 몰아 우리끼리 화실 송년회를 가지게 됬다.
우리라고 해 봤댔자 나와 그 그리고 동기하나 후배하나..
소주와 참치캔 그리고 작업할때 쓰던 그릴을 대충 닦아 삼겹살을 굽는게 전부였지만
담배몇가지와 자욱히 녹아드는 연기사이에 몇몇의 진실고백이 표면위로 떠오르기 시작됐다.
".... 나 아직 그사람 만나고 싶어요..."
앞에 앉아있던 그가 내게 말을 붙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상사화였던가..?
수줍은 미소를 한번 짓고 그는 내가 무슨 돌 부처라도 되는냥
술 힘을 빌어 조금이라도 공식적으로 그녀를 더 많이 보고싶다는 마음을 보였다.
아무말못하고 일어서 나와 전철역까지 가던 입시 동기가 꽤 충격이라는듯
"미쳤어... 그동안 왜 난 몰랐지 ? 넌 알고 있었어..?"
동기의 말에 그냥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은 내가 잃은거지..
그동안 눈치없이 난 동기도 모르게 도무지 알수없는 삼박자로 가끔 외출도 했었다.
물론 짧은 외출 후 헤어질땐 일대 이였지만....
오래잖아 동기와 후배는 그림에 염증이 났는지 입시를 끝나고 화실을 정리했다.
컴컴한 굴 속 같은 화실에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곰과 그 곰에 대한 미련함이 남아있는 나의 어느날
그의 애인이 찾아왔고 얼마 후에 벌어질 위험한 삼각 관계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고 나갔던 그가 돌아와서 내게 하는 말은 그녀가 힘들어해서 도와주기로 했다는것...
뭘까..?
"우리집에 나랑 결혼한다고 인사좀 가줘.."
"네..?"
"남편이 우리집에 전화했었나봐..당신아들이 유부녀와 만나니 조심시키라고.."
.........
아 그랬구나 갑작스레 바뀐 그의 반말 투처럼 양쪽 집 급한불을 끄라고 이사람 지금 내게 명령하는구나...
은사의 남편을 알던 내가 화실의 곰과 결혼란다고 하면 그동안의 오해(?)는 단박에 해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길길이 날뛰는 남편에게 나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은사는 화실에 들른거라고
그정도도 이해를 못해 주는거냐며 의처증이냐고 몰아 세웠다 했다.
캄캄했다.
어두운 굴 속에 갇힌것처럼 캄캄했다.
당황한 그의 입에서 이미 알고 있던 너도 한 배의 공범 이라할까봐 두려웠다.
내가 어렵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매달렸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보자고...
제발 한번만 자신의 집에 가달라고...
화실 밖 방배동 거리는 스산하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옷깃을 여미며 걷는 동안 스트레스로 불어버린 내 살들을 혐오했다..
당장 벗어내고 말거야...
오늘- 62.5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