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설거지를 하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언젠가부터 낙서하던 종이 한 면을 무의식중에 끄적이던 글귀도 ‘바람이 분다...’였다.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에 일렁이는 싸늘함이 이유일까, 바람처럼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갈망 때문일까, 주체 할 수 없는 번뇌가 때론 토네이도라도 만난 것처럼 마음을 뒤흔들려서 일지도 모른다. 내겐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3일 앞뒀던 얼마 전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11년 전 서울서 살다가 전라도 광주로 내려갔던 동갑내기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간간히 전화통화만 했을 뿐 강산이 한 번 바뀌도록 얼굴을 대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오늘 시간 되면 만날 수 있을까? 서울 올라온 김에 한번 보고 내려가려고...”
바람 빠진 풍선마냥 친구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부쩍 심신이 보대끼던 현재의 내 상황에서만큼은 만남을 피하고 싶은 그녀였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사람의 진을 빼놓는 이상한 능력을 지닌 그녀였기에. 그녀와 내가 벗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소리를 누군가에게 들을 정도로 우린 한눈에 봐도 성격이 상이했다. 매사에 느긋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언변으로 주변의 눈총을 사기도 했던 그녀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을 지니기도 했다.
“넘치는 게 시간인 나야. 몇 시에 만날까?”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 입이 마음과 다른 말을 꺼내놓고 있었다. 3년 가까이 전화가 올 때마다 녹음된 테이프마냥 같은 말만 되풀이 해줬기 때문에 만남을 가진데도 특별히 더해 줄 조언이 없었다. 그럼에도 매정하게 내 속 시끄럽다며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 그녀 역시 나 못지않은 절벽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겠기에...였다.
오후 2시, 집 근처 역까지 온 친구를 데리고 가까운 커피숍으로 갔다. 강산이 한번 뒤바뀔 시간을 보내고 마주한 친구의 옷차림이 예전과 달리 점잖다. 살이 조금 빠진 듯 했지만 탄력 있는 피부는 여전했다.
“뭐야, 실망했잖아. 챙 넓은 모자에 롱스커트, 빨강구두를 신고 나올 줄 알았더니 너무 얌전해진 것 아냐?”
아메리카노 두 잔과 작은 케잌 한 조각 시켜놓고 앉자마자 분위기 뛰울겸 던지 내 말에 그녀의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활짝 들어났다. 전생에 자신은 분명 스페인의 집시였을 거라던 그녀의 옷차림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서른을 코앞에 뒀던 지난 날, 그녀는 사춘기소녀가 백마 탄 왕자님을 그리듯 다부진 체격에 눈이 파란 외국남자와의 진한 러브신을 동경하곤 했었다. 천연덕스런 말투로 돌담이 쌓인, 그리고 잔디가 드넓게 펼쳐진 야외에서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정열적인 섹스를 상상한다던 그녀의 얼굴은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그녀를 거듭 대할 때마다 어쩜 그녀의 전생스토리가 빈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였다.
“지금도 모자를 좋아는 하는데 옛날처럼 그렇게 화려하게 하고 다니지는 않아. ㅎㅎㅎ...내가 빨강구두를 좋아하긴 했었다. 아빈엄마는 옛날이랑 똑같네. 여전히 쫄바지에 워커, 멋있다. 옛날에도 그랬잖아. 애들도 옷 잘 입혔었지?”
둘은 잠시 공유했던 지난날의 추억들을 되짚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슬리퍼 질질 끌고 다니던 펑퍼짐한 아줌마가 아닌, 아이들과 함께 겉치레만큼은 그럴싸 했었나보다. 그리고 강한 성격에 의협심도 넘쳤다나... 그리고 나온 그녀의 대사 18번.
“아빈엄마 매일 계란타령 했었잖아. 그래서 내가 사주고 그랬었지?”
궁상떨던 내 삶의 한 면을 들쑤셔 댔다. 함께 시장을 보던 어느 날 선심 쓰듯 사서 건넸던 계란 두 판, 사심 없이 받아먹고 11년을 한 결 같이 듣고 있는 그 대사다. 이렇듯 오랜 시간 생색 낼 줄 알았더라면 치킨 2마리로 얻어 먹을 걸... 평소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건넸던 계란 두 판은 크나큰 혜택이었는가 보다. 상투적일지도 모를 대화를 주고받으며 분위기만큼은 화기애애하던 순간이었다. 커피숍 유리벽 밖으로 싸늘한 회색빛 겨울바람 바닥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3년 전 언젠가 연락이 뜸했던 그녀에게서 늦은 밤 통화가 가능하냐는 문자가 와있었다. 뒤늦게 연결이 됐던 그녀의 목소린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 사회 친구인 그녀와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몇 가지가 있었다. 우리의 나이뿐만 아니라 남편들의 나이, 사업조차 똑같았다. 생일도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 늦은 밤 만취 상태에서도 귀가본능 확실한 내 남편과 달리 그녀는 신혼 때부터 남편의 사업으로 별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생활비를 받아본 적 없는 나와 달리 그녀의 남편은 월급쟁이처럼 어김없이 같은 날짜에 생활비를 입금시킨다고 했다. 난 그녀의 자유와 성실한 듯 뵈는 남편의 됨됨이가 부러웠다. -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함이 없다던 삶을 자부하던 그녀의 평소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남편이 훨씬 연상의 여자와 바람이 난 것 같다고 했다. 상대는 광주로 내려가기 전에 자신도 익히 알고 지내던 언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