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후 6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집 전화가 울린 시간이. 발신자번호가 찍히지 않는 전화기를 받아들 때까지 상대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나오는 말은 ‘누구신가요?’를 뜻하는 상투적인 말투였을 게다.
“......"
하지만 상대방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여보세요...?’묵묵부답인 수화기를 향해 되물은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흘러나오는 목소리...남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간만에 들어보는 알콜로 마비된 혀의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아빈엄마......”
“뭐야, 또 뭔 일이 생긴 거야? 왜 그러는 건대?”
술 취한 남편의 목소리가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던 내 말투는 겨울 찬바람보다도 냉랭했을 게다. 올 한 해 동안 남편은 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었다. 덕분에 다사다난한 해를 맞아야 했다. 빈곤한 살림에 더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새해로 접어들기가 무섭게 취업을 했던 내게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과 봉착해야 했던 해이기도 했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부족한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을 지닌 내 핸드폰은 고객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수만큼이나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곤 했다. 눈치를 봐가며 받아야 했던 사적인 전화의 내용은 횟수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평소 퇴근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남편의 귀가가 내 출근시간과 맞닥뜨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의 거름걸이 모습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도 같았다. 그 날은 어김없이 혀가 말린 남편의 방해공작 전화가 빗발쳤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구석에서 애들이나 보라는 둥, 애들이 망가지면 모두 네 탓이라는 어이없는 소리들로. 어느 땐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울며불며 전화해서 아빠가 여자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며 바람난 것이 분명하다고 꺼이꺼이 울어대기도 했다. 어느 땐 아빠가 쌍욕과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협박을 늘어놓기도 했다는 고자질로 서러워하는 것을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이었기에 때때로 사무실에서 잔다며 외박을 일삼기도 했다. 취업 전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각오를 했지만 도를 넘는 상황들로 업무를 이어가기 쉽지만은 않았다. 이를 물고 버텼던 나날들. 그러던 중 걸려왔던 어느 날의 남편 전화가 넘어져서 갈비뼈에 금이 갔단다. 길바닥에 눈이 녹은 지가 얼만데 눈길에 미끄러져서 사고를 당했다나... 없는 살림이었기에 열심히 붓고 있던 보험이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두길 잘 했다싶었고 당장 병원에 입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일을 해야 한다며 끝끝내 통원치료만을 고집했다. 보일러 팡팡 틀수 있는 사무실 쪽방에서 몸을 지지며 지내겠다며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 구정이 갓 지났을 때부터였을 게다. 어이가 없었다. 누굴 위해 살고 있는 그인지, 그동안 벌어드렸던 알량한 남편의 수입금 전부는 명세서 한번 날아 온 적 없이 일을 위해 긁어 댔다는 자재 값 명목의 카드 값으로 고스란히 나가기 일쑤였다. 부모의 부재가 많은 집에서 고1 아들과 초등학생의 딸은 시도 때도 없이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싸워대는 듯 했다. 게다가 딸은 중학교 다니는 선배들에게 협박을 받고 돈을 뺏겼으며 맞기도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대인공포증에 걸린 듯 바깥 출입을 두려워하는 딸을 지켜보다 못해서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 다니며 마무리 짓고 돌아온 날도 남편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집으로 전화를 했다. 갈비뼈가 나갔다며 통원치료를 받는 사람이.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그의 체면만을 지켜주며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귀가하던 한 날, 집이 아닌 남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갑자기 들어 닥쳤던 사무실 쪽방의 광경은 나를 더욱 분노케 했다. 같이 기거하고 있다는 직원은 냉장고에 기대어 앉아서, 중증 환자라며 죽어가는 소리를 해대며 술을 마셔댔던 남편은 팔자도 좋게 이불 덮고 누워서 TV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세상 편하게. 가정 안에서 싸울지언정 집밖, 남들 앞에서 만큼은 남편을 존중하려 나름 노력했던 나의 의지가 저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뭐니!!! 너란 인간! 사람의 탈을 쓰고서 어쩜 그리도 못돼 먹었어. 애들에게 뭐가 그리 당당해서 욕질이야!!!”
발악 질을 해댔다. 난처해하는 직원이 있거나 말거나, 건물 밖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상관 할 바 없었다. 더는...
“왜...왜 그래? 갑자기 나타나서!”
직원 앞에서 떨어진 발등의 불에 자존심 상했는지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돈 벌어서 변변히 생활비는커녕 제 카드 값 메우기도 힘겨운 인간이, 다달이 이곳저곳에서 압류장이나 날아오게 만드는 인간이, 가장이랍시며 대접은 받고 싶다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이제... 더는...!!!”
“그만 해라. 좋은 말로 할 때!”
발랑 누워있던 사람이 힘겨운 듯 몸을 일으켜 세워 앉으며 윽박지르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뭘 그만해! 창피하니? 이런 게 너란 인간은 창피한 거니? 아비노릇 못하는 거, 처자식 못 돌보는 건 괜찮고, 남 앞에서 목청 높이는 마누라, 이건 창피해? 그만 하지 못하겠다면 어쩔래. 내가 뭐랬어. 너란 인간 혼자 자유롭게 훨훨 살라며 이혼 해달라고 했잖아! 니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떡하니 호적에 내 남편, 아이들의 아빠로 있겠다는 거야?!!!”
활화산 그 자체였을 게다. 내 모습이. 아니 어쩜 광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