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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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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6)-팔불출?


BY 솔바람소리 2009-12-14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고 긴 밤이었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그득한 방안으로 간간히 도로 위를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가 흘러들었다. 야심한 밤, 자유를 만끽하며 달리는 그들이 부러웠다. 어미에게도 차가 있다면 몰고나가 그들처럼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정도로.

생각으로 그득 찬 머릿속이 좀체 정리되지 않으며 눈알이 뻣뻣해지는 피곤을 몰고 왔지만 새벽 3시를 넘기고 4시를 넘기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 중에 남편이 들어왔다. 어느새 새벽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그는 어둠을 등지고 앉아있는 아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태연한 모습으로 씻기 위해 들어갔다 나온 욕실 문 앞에 서서 곤히 자고 있던 해피를 목청 높여 불러 댔다. 어떠한 시간이든, 가족들의 어떠한 상황이던 상관없이 제 기분대로 떠들어대던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곤 망부석 아내를 지나서 도착한 냉장고 홈바를 열고 꺼낸 물통의 뚜껑을 열더니 냉수를 한참동안 들이켰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 빠져 나왔어.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놔주질 안더라. 그 놈이 옆에서 전화통화를 다 듣고도 보내주지 않는 거야...에이 씨, 공사 따는 일만 아니면 확 엎어버리고 오려고 했는데...”

투명인간이라도 됐는지 알았다. 잠시. 보이지 않는 양 무시하고 행동하길래 그런 줄 알았다. 차라리 투명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끔찍한 인간의 눈을 피해서 숨어 살 수 있을 텐데. 물을 마시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가 눕던 사람이 취하지 않았다는 듯 혀를 긴장 시키며 꺼낸 말로 인해서 상상의 나래를 접을 수 있었다. 시력 좋은 눈으로 덩치 좋은 마누라가 보이지 않았겠냐는 듯, ‘너 여지껏 그러고 앉아있던 것 잘 알고 있었다.’라는 듯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5시를 넘긴 시간에 들어와 놓고도 핑계를 대고 도망쳐 왔다니, 함께 있던 인간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부류의 인간말종임에 틀림없으리. 공사를 따기 위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싫어도 그 한 몸 술로 희생하며 밤을 불사르다 왔다는 듯, 장황한 얘기들이 그 입을 통해서 나왔다. 2시간 이상을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술주정치고 많이 발전한 대사였다. 맨 정신으로 일을 논해도 성공할까 말까, 대착 없는 사람이 어째 매번 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났다하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돌아오는 겐지, 언젠가 혹여 술 상무라도 된 것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내 돈 들여 술 먹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끌고 다니면서 돈 따박따박 내며 얘기하자는데. 가야겠다고 하면 일 안하고 싶으냐고 엄포를 하고... 제가 하는 일 델구 다니며 보여주는데 현장들 하나같이 크더라. 좋은 중형차 태워 끌고 다니면서 통 크게 돈 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역시나 제 돈을 들여 술을 먹지 않았단다. 묻지 않은 말이었고 궁금치도 않은 일이었다. 중형차를 몰고 다니는 인간이 술을 샀던, 리무진을 끌고 다니는 인간이 밥을 샀던, 그 인간이 커다란 사업채를 운영하는 인간이던, 궁금증이라고는 생물체를 구성하는 세포핵만큼도 없었으니까. 어떤 좋은 구실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온전한 정신이 못 박힌 인간이라면 밤새도록 술잔을 붙잡고 있을 리 만무함을, 진실함을 지니긴 했을지 난해한 남편이란 사람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제 돈으로 술을 산 적이 없다던 남편의 카드 값 내역이 남편의 인터넷뱅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달 국민카드와 현대카드에서 빠져나가는 금액이 평균 생활비로도 주지 못하는 250만원을 웃돌았다. 그 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나갔다. 카드결제대금에 대한 내역서를 집이 아닌 사업장으로 정해놓은 것을 따졌던 어느 날,

“그럼, 집으로 오게 할 테니, 당신이 모두 막아.”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결국 명세서 내역이 집으로 오는 일은 없었다. 차의 기름 값과 설비에 들어갈 자재 값으로만 카드대금 지출을 하고 있다는 신빙성이라고는 사막의 고운 모래한 알만큼도 없는 입으로 말하기도 했었다.

“조금만 참아봐. 힘든 것 다 알아. 내가 일을 얼마나 많이 해놨는지 알잖아...”

조금만? 17년 동안 꼬박 고수해온 그 대사, 넌더리가 난다. 일을 얼마나 많이 해놨는지 아느냐고? 그동안 마신 술의 양과 수북이 쌓인 거짓말의 양쯤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만은 도통 알 수 없었고, 결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일을 갔는가 하면 낮부터 술을 푸고 있던 적이 얼만데... 어느 누군 야무진 언행을 지녔으면서 어째 남편 하나를 휘어잡지 못하느냐고 어미에게 전하는 아쉬움 담은 말의 끝자락에,

“혹시, 딴 살림 차린 것이 아닐까? 일한다고 나가면서 어째 그렇게 돈을 안 가져다 주는 거야?”

하는 의문을 붙이기도 했다.

딴 살림? 어미처럼 골빈 여자가 세상에 또 있을라나? 어미처럼 어리석은 자리에서 뭐하나 볼 것 없는 남자의 세컨드라도 좋다고 자리하고 있는 사람이 말이다. 있다면 만나서 손이라도 따뜻이 만져주며 웃돈 얹어 준다 해도 싫을 남자 고스란히 인수인계 해주련만.

“사랑해... 당신 없으면 내가 이러고 살 수 있겠냐? 그래도 아내가 있으니까 내가 기 피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 안다. 나도 사람인데 모르겠냐. 성질 보통 아닌 당신이나 되니까 내 옆에서 있어 주는 거 안다. 내가 밖에서 얼마나 자랑하고 다니는지, 팔불출 소리 듣고 살어...ㅎㅎㅎ”

마음 비우고 듣는다면 뿌듯할 대사가 곳곳에 묻어 나왔지만 이미 황폐해진 마음이었고 피폐해진 두뇌였다. 귓속을 파고드는 말들이 ‘바보’‘멍청이’‘등신’과 연관된 의미로 해석되어 전해졌다. 팔불출이라고... 끼리끼리 모인 자리에서 보통사람들의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을 엉뚱한 소리들만 늘어놓으며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 인간들에게 그런 소리를 주워 담아 왔다고 고마워할 사람 없었다. 자신이 기를 피고 살 때 기죽어 살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역시나 쉬이 닫아 질 주둥이가 아니었다. 다리미를 가져다가 지긋이 그 입술에 들이대어 눌러주면 붙어 버릴라나.

“입 닫어. 사기꾼이랑 있다 온 것 자랑하는 게 아니라면.”

상종을 말자, 다짐을 했건만 인내가 바닥으로 들어난 마당에 따라주지 않았다.

“사기꾼?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다고 나 같은 놈한테 어떤 놈이 사기를 치냐?”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어떤 봉사정신 투철한 인간이 밤새워 좋은 안주에 술을 사 먹이고 있었는지 말이야. 그리고 지금 쌓인 압류장만으로 부족해서 더 날아올 것이 있는 것이 아닌지, 곧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아들내미가 입학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는지, 졸업장이라도 딸 수 있으려는지 그것도 궁금하고.”

“ㅎㅎㅎ... 알았다. 알았어. 걱정 붙들어 매. 그래서 내가 안 가르쳤냐? 굶겼냐? 이 집에서 나밖에 일하는 사람 어딨다고.”

“처갓집에 가서 그 대사 한번 다시 읊어보시지. 굶겼냐고? 뻔뻔하고 염치없는 입 그만 닫어. 그동안 밖에 나가는 것을 온갖 방해 다해놓고 협조 한번 해주지 않은 인간이 혼자 일했다고 유세야? 유세라도 뭔가 해놓고 해보던지. 후에 똑같은 사위 만나걸랑 장인만큼 해야 할 텐데, 아니, 난 상상도 하기 싫어. 아영이가 제 애비 같은 놈에게 시집간다면... 결코 보고 있을 수 없어.”

겁이 나는 미래 중에 한 부분이었다. 어미 팔자를 그대로 닮는다는 딸에 대한 속설이. 부디 좋은 남자 만나서 아비사랑 제대로 받지 못한 한을 풀어가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어미는 예를 들어 꺼낸 말이 이뤄지게 될까봐서 후회막급으로 남았다. 자식 일에 대해선 말 한 자락까지도 신경 쓰이는 어미... 자식에겐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 그런 어미로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 지시한바 없었다. 그래야 한다고 본능이 알려줬을 뿐. 그런 본능이 쫙 갈라지고 만 것이 한 가지 일, 한 순간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좀 먹었던 마음이 한 순간에 도드라지고 만 것이다. ‘더는 이런 꼴을 지켜 볼 수 없다.’ ‘괘씸한 자식들...’ 어느 순간 자식들을 향해서 들어난 상처였지만 그래도 자식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다. 살아서는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어미에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