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에게 죽음은 그림자와 동격이었다. 빛의 존재여부에 따라 사라졌다, 비췄다 할뿐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그림자와 같이 죽음이 그러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땐 잦아들던 그것이 그렇지 않을 때면 뚜렷이 음습 진 상태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곤 했다. 파랗거나, 어둔 밤 달빛이 드리워진 하늘을 대할 때나, 지천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어미를 위로하기는커녕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것 같은 외로움을 짓게 했다. 그 고질병을 큰 아이가 8살이던 때에“이 세상 태어나서 아이들 낳은 것 말고 해놓은 것이 뭐가 있나요?”라고 물어오던 어느 고스님의 말씀 한마디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쳐먹게 되었건만. 지금에 와서 다시...
얼마 전부터 부쩍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상처받은 자식들은 희생자일 뿐이라고, 그것들의 잘못은 없는 거라며 이성이 속삭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이란 놈이 그동안의 희생을 화두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삶의 덧없음을 고해왔다. ‘세상 태어나서 애새끼들 내지른 것 외에 한 일이 없었다마는 누가 뭐래도 할 만큼 했어. 뜯어지고 찢긴 가슴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자아를 내동댕이치며 ’가족‘을 우선시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힘겨워서 넘어지고 일어설 수 없을 때면 자식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었어. 이놈의 썩어빠질 집구석에서 어미로서의 인생길을 이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가시밭길을 한 길처럼 지나왔다만 이제 힘이 다 해버렸어. 더는 못해’
아들이 제 어미 마음을 어떡하든 돌려보겠다는 듯 간곡한 모양새로 말을 전해왔지만 닫힌 마음의 문이었고 해봐야 소용없는 넋두리들로 가득 찬 어미의 머릿속이었다.
“알았으니까 들어가서 자.”
“밤도 늦었는데 그럴까요? 오랜만에 엄마랑 자야겠다. 아니, 셋이 함께 잘까요?”
몇 시였는지 시간을 보지 않았다. 밤이 깊었을 거라는 짐작으로 형광등 불빛을 머금은 채 어둠을 등진 창문을 봐라봤을 뿐이다. 그런 어미의 대꾸가 없었음에도 아들이 제 방에서 잠든, 제 아비도 들지 못하게 훌쩍 커버려 제법 무게 나가는 동생을 안고서 바위처럼 꿈쩍 않고 앉아있는 어미 곁으로 눕혔다. 모녀가 누우면 딱 맞을 크기의 거실에 어떻게든 비집고 누워보려던 아들이 안 되겠는지 문턱을 사이에 두고 있는 주방 바닥으로 요를 들고 와서 깔려고 했다. 어미가 밖으로 나갈 것을 염두에 둔 것처럼.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잠자리라도 편이 자.”
어미의 말에 아들이 잠깐 대꾸 없이 바라만 봤다. 몇 초간이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엄마, 정말 그래도 돼요? 이제 좀 마음이 풀리신 거지요? 제가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 거지요?’ 하고 묻는 듯 했다. 아들의 무언의 질문에 대답을 어미도 눈빛으로 대꾸했다. ‘네 걱정대로 이 밤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마지막 아침이라도 따뜻하게 해먹여서 학교 보내고... 정리할 것 좀 해놓고 그때 떠날 생각이야.’
아들을 대했던, 그 순간 염치로 국을 끓여 먹은 듯 매정한 생각만을 가득안고 있는 것이 미안한 어미의 낯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질 미련이 없는 포기의 심정이 서서히 눈물도 잦아들게 했다. 조금은 편안해진 어미의 모습이 안도가 되었나보다. 알겠다며,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부르라는 당부를 남기고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노동판에서 막일을 한 잡부처럼 피곤이 묻어났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죽어 저승에 가서도 풀지 못할 한이 다시금 복받쳤다.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곁에서 곤히 잠든 딸에게로 젖은 시선을 향했다. 다행히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마냥 편안해보였다. 달콤한 팝콘 향기 그득한 영화관에서 강냉이를 물고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딸과 보냈던 한때의 의미가 파도에 쉽사리 부서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지구의 종말을 앞둔 상황 앞에 어떠한 고난적인 인간사를 비교한대도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거라던, 영화를 대한 순간에 지녔던 여러 마음 중 한마음이 온대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에 차라리 지구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어서있었다. 아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순간에 땅이 갈라지고, 시뻘건 화산이 터지며, 태산보다 더 높은 해일이 밀려들어와 우릴 삼켜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렇다면 비겁한 어미가 되어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될 테니, 그렇다면 세상에 남겨놓은 자식들에 대한 연민의 미련 따윈 갖지 않아도 될 터이니. 뇌리가득 넘쳐나는 잡다한 생각들, 복받치는 미련들로 실랑이를 벌이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간은 새벽 1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 시간, 가정을 무료하숙집 정도로 여기는 무심한 남편이란 존재는 어느 구석에서 비슷한 인간들과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집구석 돌아가는 것도 모르면서 부진하고 침체된 세상을 통탄하며 있을 것이다. 잘난 가장 덕에 경제적인 규제와 억압을 받는 처지에 놓인 처자식은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순간에도 모든 원인을 제공한 자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그에 대한 미련을 버렸던 어느 순간부터 며칠 밤낮 소식 없더라도 근심으로 전화기를 들어 본적 가물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남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얼마 만에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늦은 시간에도 상냥한 여성의 음성메시지가 들려왔다. 가족에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하는 주둥이로 술을 푸고 안주를 쑤셔 넣느라고 바쁜 건지, 아니면 음치와 박치 수준을 적절히 섭력한 실력으로 풍만한 젖가슴을 들어내고 출렁이는 금발의 여성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노래방에서 심취해 있느라고 휴대폰의 알림을 무신경으로 팽개쳐버렸는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화가 될 때까지 몇 백번이라도 시도할 작정으로 두 번째 연결을 도전(?)했다. 그리고 연결된 휴대폰 건너편에서 생각보다 혀가 덜 말린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몇 시에 들어와서 또 미안하다는 소리를 할 건대?”
“알았어.”
더 이상 억누를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시도한 전화였다. 터져버릴 것 같은 지닌 심정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 미련으로 보여질까봐 차분하고 또 차분하려 했다. 더 이상 품어봐야 소용없는 바람 따위 지니지 않고 세상 떠나기 전 마지막이 될 대화를 시도했건만 여전히 일관된 건성답변이 흘러나왔다.
“뭘 그렇게 알아. ‘알았어’ 라는 말이 아무 때나 붙일 수 있는 만능대사야?”
“옆에 사람들 있다.”
“그 옆에 있다는 사람들이 당신이란 사람이 명색만 가장으로써 처자식도 건사 못하는 기둥서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까? 아니면 곁에 있는 인간들도 같은 족속들일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도 인간인데 얘기는 해야잖아. 들어오면 하라고? 술에 떡이 되어 들어와서 귀가 닫히고 더런 입만 살아있는 인간에게? 나갈 때는 아침이라서, 낮에는 일한다는 명목으로, 17년을 하루같이 밤이면 매번 이런 상황인데... 술 취하지 않고 집구석에서 있을 때면 TV나 잠에 방해를 받아서 짜증이고?”
“알았어. 그만해.”
짜증이 묻어난 남편의 목소리를 끝으로 끊어진 전화였다. 해야 할 말이 아직 산더미처럼 많은데, 더 취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맨 정신이 남아있을 때 해놔야 할 말들이. 남편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문처럼 남아있어야 할 말들이 말이다. 그건 부부가 함께 했던 순간 내내 한만을 품게 된 마누라가 죄 값으로 남편에게 남겨주는 몫이 될 테다. 다시 남편의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는 전화를 고집스레 눌러댔다. 작정한 마누라의 고집을 알아챘는지 이윽고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름은 최선을 다하며 받고 있다는 듯 각오가 다져진 목소리였다.
“그렇게 살아온 가장자리,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아니다. 미안해란 사과가 말버릇이 됐으니 반성도 습관이 됐을 테지. 저지르고 반성하고 사과하면 끝. 그렇게 편한 사고를 아이들에게도 적용해보지. 47년 살고서도 깨달은 바 없는 사람이 고작 16, 12살 자식들에게 다그치면 안 되잖아. TV보는 것부터 일찍 잠자리에 눕는 것, 학교에서 끝나자마자 집에 와야 하고 친구들이라도 만날라치면 한데 싸잡아서 못된 놈들 만드는 것까지. 나는 망쳤으니까 너희들은 똑바로 살아라?! 그런 이기적인 욕심이 어디 있니? 하루살이라서 미래가 없는 것도 아니고 후에 그 뒷감당은 어찌하고 살 거야.”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미리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만나게 된 일이라서 그럴 새가 없었어.”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했다는, 조금은 풀이 죽은 듯 한 목소리는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질 못했다. 술자리에 대해서 사전에 연락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아내가 화가 난 것이라고 단정 짓는 그의 단순한 사고가 부럽고 부러웠다.
“난...정말 힘들었어.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어. 그런 내가 안보였니? 그 눈은 TV와 술 밖에 안 보이는 눈이었어? 내가 했던 노력의 결실은 모두 사라져버렸어. 이제... 더는... 의미가 없어. 자식도 남편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난 모든 것이 후회가 남는데, 당신이란 사람은 괜찮은가봐. 여지껏 우리들에게 저지른 죄가 얼만데, 이 늦은 시간 전화기 잡고 떠드는 마누라의 상처가 고작해야 전화 한 통화 못 받은 것 때문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은 도대체 뭐로 만들어 진 것일까... 됐어... 더 말해서 무엇해.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내가 던진 공은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쯤은 알아둬. 뭐든 준 대로 받는다는 말이야. 누굴 원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죄 값이라고 여기며 달게 받아...”
할 말에 만분의 일도 꺼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남편의 바람대로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얼굴이 쓰릴 정도로 닦아낸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통화하는 내내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말의 끝자락이 울먹임이 되어버린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