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깬 밤이다.
몇 날 며칠 병든 닭처럼 졸음에 취해 지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박 오지 않는 잠과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이 밤이 그랬다. 설 잠 들었던 것을 깨어 말짱해지고 말았다. ‘어쩌다 잠이 깼을까? 또 잠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하는 헛생각 따위 이제 저만치 던져버리리라. 25년 안경잡이가 창안으로 스며든 희미한 빛을 의지해 안경 없이 주변을 응시했다. 익숙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희미한 형체들이 안경을 쓰고 봤을 때완 사뭇 달라 보인다. 어둠속이고보니 분위기도 다르다. 침침한 눈으로 낯선 곳을 대하듯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위이잉... 귓가를 맴도는 모기 한 마리. 여름모기란 말은 옛말이 됐다. 작년 초겨울 입김 날리는 밤거리에서 놈들이 힘차게 날개 짓하며 사람들 사이를 비상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바있었다. 올여름부터 철통같은 수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묘히 집안으로 들어온 놈들에게 뜯긴 피의 양이 한 종지는 될 성싶다. 불을 켜고 숨어버린 놈들을 찾다가 날아간 잠들은 또 얼만지. 때론 귀찮아 손사래를 치며 버틴 적이 있었지만 무자비하게 몸 곳곳으로 주둥이 빨대를 들이는 놈들의 극성에 흡혈모기에게 뜯겼다가 입이 모기주둥이가 된 사람이 없을까? 그 첫 희생자가 또 억세가 좋은 운을 달고 사는 내가 되는 것은 아닐런지, 물린 곳의 가려운 상처들과 함께 영양가 없는 생각을 덤으로 안고서 더는 못 견디며 몸을 일으켜야 했던 밤들이 또 얼마였던가.
위이잉... 오른쪽 전방에서 그 징그러운 놈 한 마리가 부지런을 떨며 날개 짓을 한다. 턱! 소를 때려잡고도 남을 손으로 어림하며 낚아채듯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기대하며 바짝 눈앞으로 가져온 주먹을 펴고 봤다. 뭔가가 얼핏 보인다. 운 없는 놈이 손바닥 지문사이에 파묻혀 터졌는지 비릿한 핏 내를 풍긴다. 젠장... 어쩌지? 이제 몸을 일으켜야하나? 아니다. 묘책이 있다. 곁에 읽다가둔 책 위에 메모지를 둔 것이 생각난다. 한 장을 뜯어내어 꼼꼼하게 문질러 닦아냈다. 핏 내가 가시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켜야 될 정도로 지독하진 않다. 나, 제법 참을성 많은 진득한 여자다. 놈의 방해로 중단됐던 집안 탐방을 위해 다시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먼저 6년 전 이사 오던 첫날부터 제역할 못하고 초인종으로 전락하고만 인터폰의 빨간 전원불빛이 들어왔다. 빛이 야구공만치나 크게 퍼져 보인다. 눈에 비췬 크기라면 거실 가득 붉은 빛을 밝히고도 남아야 하건만 괴물의 눈 같아서 밤이면 무섭다며 아영일 떨게 했던 그 빛은 어둠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씨가 앉은 민들레송이모양이 되어 눈 안으로 들어온다.
다시 눈길을 돌린다. 이번엔 남편이 잠들었을 안방의 문과 나란히 붙은 아들의 닫힌 방문이 블랙홀의 입구처럼 오묘한 형태가 되어 들어온다. 육중한 몸을 일으켜 달려들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할 지경이다. 호기심에 못 이겨 행동으로 옮긴다면 이 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까?
< *속보입니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한 4층 단독주택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밤중에 처참한 몰골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까스로 피신한 피해건물에 살고 계신 한분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요?!
- 글쎄요... 저도 자다 말고 달려 나와서 정신이 없지만 처음엔 콰앙!!! 하는 굉음이 나더니 우지끈 금가는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건물이 심하게 흔들리기에 지진이 난줄 알고 가족들 데리고 밖으로 피신해서 나왔는데... 금방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우리 건물만 이리, 폭삭...내려앉았지 뭡니까. 이게 뭔 일이래요?...
*다행이 건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찍 피신을 한 탓에 인명피해가 발생하진 않았습니다만 희한한 일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발견된 문 한 짝이 만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괴 생명체의 형태를 하고서 뚫려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사람의 형태라고 하기엔 덩치가 크고 코끼리라고 하기엔 모호한... 요즘 도심 이곳저곳에서 멧돼지가 출몰하는 일이 빈번하다지만 집안까지 들어갔다고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 피해 현장엔 여러 기관에서 나와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검시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는 대로 속보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
생각에 생각을 시리즈로 매달다가 의식하며 상상했던 육덕진 배를 쓸어본다. 바로 누웠건만 동산을 이룬 뱃살들. 쉬이 줄지 않는 이것들을 어찌할꼬, 한숨 같은 짧은 한탄이 입안을 맴돈다. 상상은 상상일뿐 실천하지 말아야지.
다시 나와 나란히 누운 딸의 모습에 성능 떨어진 시선을 던져보았다. 이런, 상상을 더하니 기괴함을 넘어서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스산한 창밖의 빛을 그대로 받은 딸의 모습이 영락없는 전설의 고향의 주연배우다. 명석하지 못했던 두뇌가 점점 더한 쇠퇴 속에 빠져들기에 체념해가던 순간들이었건만 기뻐해야하나... 상상의 나래는 아직 녹슬지 않았는가보다. 딸의 모습에서 소복의 긴 치마차림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시뻘건 긴 손톱이 휘지 않고 곧게 날을 세운 것도 기술로 긴 머리칼 늘어트리며 설치는 뭔가로 보이고 만다.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이쯤 돼선 주섬주섬 안경을 찾아 얼굴위로 합체시킬 수밖에. 안경 벗고 본, 어둠이 안개처럼 뿌옇게 낀 집안 탐방을 종료하고 만다.
드디어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고 밖을 응시했다. 저만치 떨어진 불 꺼진 아파트 건물이 담장처럼 앞으로 향한 시야를 막고 섰다. 별도 달도 없는 고요한 밤이다.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소리와 시계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엇비슷하게 들려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제대로 된 시선으로 세상사를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바로보고 바른 생각에 바른 판단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안경 쓰고 1,0의 시력으로 좋다, 싫다, 맞다, 아니다, 멋지다, 비겁하다... 보고내리는 판단들이 모두 정답인 것일까...... 그동안 보고 판단한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실수들을 하며 살아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