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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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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된 잔고가 내 탓만 같아서(2)


BY 솔바람소리 2009-06-24

연륜이 쌓일수록 사자성어 <역지사지>를 떠올릴 때가

많아졌다. 그중 친정엄마와 내 자리를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늙으면 돈이 힘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각인되기도 했다.

엄마에게 힘을 실어드리지 못할망정 더는 뺏는 딸이 되지 말자,

다짐에 다짐을 반복했다.

딸년은 도둑이라는 몸을 몸소 실천만 하고 살아왔던 내가

그래서 엄마의 비자금을 묵고하자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간간히 인터넷뱅킹을 열게 될 일이 있을 때 염탐하듯 살짝

잔고를 들춰보긴 하지만 엄마의 비밀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만원을 훌쩍 넘었던 엄마의 돈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인출되더니 이윽고 900만원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아마도 2007년으로 내가 잠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였던 것 같다.

남편 몰래 갖고 있던 비자금 중에서 백만원을 떼어내어

엄마가 관리하는 내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시키고 난 뒤에

문자로 알려드렸다.

 

몇 년 전부터 움직일 수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공장에

취업한 엄마가 점심시간에 연락을 하셔서는 주변사람들 들으라는 듯

 

“뭔 용돈을 백만원씩 보내~ 딸래미~ 엄마 다음에 또 줄 거야?”

 

화통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주변 분들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까지 함께 들려왔다.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늘 상 턱없이 컸건만, 생전 처음 드려 본 백 원대의 용돈을 남들 앞에서

대놓고 좋아하시는 엄마의 모습에 괜시리 코끝이 찡해지며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지만

“응, 엄마~” 밝은 목소리로 겨우 짧은 대꾸를 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을까 엄마가 그 돈으로 금 한냥의 내 목걸이를

맞췄다고 연락하셨다. 모처럼 딸다운 행동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 덜 수

있던 딸 마음은 어쩌라고 돈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쁜 목소리로

 

“디자인 이쁜거로 했다~ 빨리 주고 싶네.” 한껏 들뜨신 엄마셨다.

간만에 면목 찾을 행동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 순간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 후로 또 이틀이나 흘렀을까? 이번엔 긴장한 목소리로 엄마가 전화를

걸어오셨다.

사연인즉, 목걸이 값을 지불하려고 통장에서 돈을 꺼내려는데

비밀번호가 3번이나 오류가 나며 잠겨버렸다는 거다. 그것을 풀어야하니

내 등본과 신분증을 보내라셨다. 업무가 많아 바쁜 와중에

해당 은행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리고

엄마가 출가한 딸의 명의로 통장을 관리하다가 비밀번호 오류로

잠겼을 경우 본인이 가지 않고 풀어낼 방법을 알려달라니 곤란하단다.

전후 사정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엄마만의

비자금으로 존재해야 할 돈이니 내가 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어디서 알아보셨는지 등본과 신분증만 있으면 해결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엄마를 위해서 복잡하더라도 따를 테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급하게 있을 엄마가 걱정되어 직장에서

1시간을 일찍 퇴근해서 은행에서 알려준 서류들을 준비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마감시간 몇 분을 남겨놓고 관할 주민자치센터를 찾아가

인감증명을 만들어서 발급받고 사유서를 작성해서 운전면허증과 함께

동봉하여 등기로 보내드렸다. 그렇게 일단락된 나만의 007 양쪽 뺨치게

<엄마 비자금 시침 뚝>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바쁘고

급했던 날이 있은 얼마 후 엄마의 돈까지 보태서 만들었을 금 한냥의

목걸이를 목에 걸 수 있었다.

 

“엄마가 돈을 줘봐야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까 이제 앞으로 금으로

만들어서 줄텨. 아무리 돈이 궁해도 팔지 말어. 알았지?“

 

2년을 넘기도록 그 말씀이 귓가에 메아리치는 바람에 생활이 궁핍해도

제법 올랐다는 금값에도 엄마가 해준 두 돈의 반지와 한 돈의 핸드폰 줄,

한냥의 목걸이를 들고 금방을 찾아갈 수 없었다. 궁핍의 갈림길에서

유혹을 수없이 넘겨야 했지만 말이다. 분에 넘치는 금을 내 몸에 지니고

있어도 그것은 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크다.

 

모든 여건이 여의치 않아 궁핍 속에서도 손 놓고 집에 있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다보니 점점 제대로 된 딸과 거리를

멀리하는 요즘, 면목이 없어서 연락조차 드리지 못 했었다.

그렀게 지내던 한 달 전, 오랜만에 인터넷뱅킹에 들어갔다가 엄마의

비자금을 확인하게 되었다. 잔고가 20만원대가 되어있었다.

 

내역을 확인해보았다.

언젠가 허튼 곳에 쓰지 말고 보약을 해먹으라며 내게 건넸던

50만원과 대화중에 실언으로 맛이 간 전기압력밥솥을 운운했던

뒤로 머지않아 밥통 값이라며 붙이셨던 50만원 외에 어디다 쓰셨는지

그 만큼씩의 돈이 얼마간의 간격으로 빠져나가더니 어느 날엔

600만원가량이 훌쩍 빠져나간 내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뭔 일일까? 엄마가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했던 것이 아닐까?

별별 걱정들이 들끓었지만 모른 척 시치미 떼고 있던 것이 얼만데

새삼스레 여쭐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사업을 시작한 막내 남동생의 고충을 들은 터였다.

어쩜 엄마는 그나마 남은 돈으로 녀석에게 구원의 손길조로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엄마의 비자금이 고갈직전에

직면한 것이다.

 

언젠가 엄마의 넋두리중에 꽁생원이 됐다는 친정아버지가 엄마의

월급이 입금되는 통장까지 쥐고서 놓지 않는다셨고 동생들이 모두

용돈을 드린다는 게 엄마 몫까지 아버지께 한데 묶여 조달 됐고 그 돈을

엄마에게  전해진 적이 없으시댔다.

돈줄이 막힌 엄마는 쑤시는 삭신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낙원이라는

찜질방을 한번 찾을라치면 구차스러울 정도로 사설들을 늘어놓아야

한다며 앞으로 용돈을 따로 챙겨 달라고 하셨었다.

엄마 마음을 헤아려 따르려는 나와 달리 1년이면

몇 번이나 챙겨드리는지 모르겠으나 올케들이 간간히 드리는

용돈봉투를 따로이 준비하는 것을 때때로 잊는 듯 했다.

 

부모님은

20대부터 50대가 가깝도록 두어 번의 생업 바꾸기 시도가

있었지만 항만이 들어서며 그만둬야 했을 당시까지 천직처럼

다시 바다를 찾으셨다. 어부 남편을 따라서 배를 타는 것은 물론

바닷가에서 잡은 생선들을 팔아야 했던 엄마의 일은 늘 여자로써는 고된

일이었지만 생선비늘 덕지덕지 붙은 엄마의 전대는 늘 두둑했었다.

 

(당시 엄마의 비자금도 함께 두둑했을 게다. 내게 들어 왔던 후에

그 많은 돈들이 극비리에 내게 조달 될 수 있던 것을 보면 말이다.)

 

학창시절부터 휴양을 해야 했던 당시까지 집에 붙어있었을 때,

내 눈에 비친 엄마는 어둠이 깔린 밖에서 돌아오시면  땀과

생선물들이 튀어 마른 냄새나는 찝찝할 몸을 닦기에 앞서 바닷물을

머금은 촉촉한 종이돈들을 정리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전용 깔판으로 쓰이던 누런 넓은 종이를 펼친 곳으로 우르르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지폐들이 쏟아져 내리곤 했다. 받은 돈을 구겨

넣을 정도로 바쁘셨을 하루의 고된 노고를 지폐 한 장씩 펼치며 손안에

쌓아 쥐는 것으로 푸는 듯이 보였다. 돕겠다며 만지려는

내 손에 비린내가 묻는다며 말류했던 엄마는 그중에 나오는 제일

깨끗한 돈들을 옆에 있는 내게 간간히 “이건 딸 몫”하며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며 물으신 적이 없으셨다. 엄마의 피곤해

보이는 몸이 안쓰럽긴 했지만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내게 들어오는

파랗거나 갈색의 지폐가 내 수중으로 건네지며 쌓이는 그 시간이

마냥 좋았다. 내 주머니는 늘 풍족했었다.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엄마가 한 번씩 그때를 돌이키며,

 

“그때가 좋았다. 내 딸한테 팡팡 돈을 대줄 수 있던 때였는데

힘이 제일 많이 들 때였지만 내가 제일 잘 나갔던 때가

그때였다. 그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서 니 아빠 따라 다니며

그 많은 일들을 해냈나 몰라...“

 

그리운 듯 말씀하셨다.

 

“그럼, 엄만 타이머신이 있다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대꾸했던 내 말에

 

“싫다. 니들 모두 출가시켰고 이제야 내 할 일 다 한 것 같은데...

그 고생 다시 할 자신은 없다. 이제 일이 겁나...“

 

셨던 어느 밤 어둠속에 누워서 나눴던 엄마와의 대화...

나 역시 지금의 삶이 후회되지만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자신은 없기는 마찬가지로 그 마음이 어떤 뜻인지 알 듯도 싶다.

살아갈수록 부모에게 갚아야 할 빚이 더해감을 느낀다.

특히 엄마에게.

 

내 삶이 웬만큼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효도가 될 것이다.

내 인생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크지 않은 바람이건만

기본적인 그 효를 다하지 못하고 사는 불효막심한 딸의 자리에서

굴속에 혼자 숨어들은냥 홀로 상념과 좌절 속에 말려들기만 

거듭했다. 정리해 말하자면 생각만 많아지고 실천을

못했다고나 할까.

 

엄마의 바닥 난 잔고를 확인한 후 더욱 그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