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2007의 A4용지와 같은 흰 바탕에 글을 채워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쏟아낼 수 있었다.
토해낼 수 있었다.
후에 써놓은 것을 다시 읽고 낯이 뜨거워질지언정 자판에
손가락 올려놓는 것이 내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마저도 두려워지고 말았다.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나의 삶과 관념들 그 속에서
우후죽순 솟는 것이라고는 쓸모없는 열등감뿐이다.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부끄러워지고 만다.
요즘 내게 보인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암흑과도 같았다.
그 속에서 발을 헛딛어 절벽으로 떨어지는 아찔함을 느꼈다.
바이킹을 타고 아래로 곤두박질 쳤을 때와 비교해서
손색없을 정도였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가슴 아픈 충격에 놀랐을 땐
번지점프하면 이런 기분일까,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갖기도
했다.
전국이 애통함으로 들썩이고 있다.
그런 국민의 심정이 하늘에 전해진다면 그 분...
구천을 떠돌 일은 없겠지.
경제를 살렸건 아니건 시시비비 많았던 그 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기에
떠난 빈자리가 더욱 애석하게 다가오는 걸게다.
그 분의 서거는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떠안고 가신
희생으로 해석되어 영명으로 길이 남고 후세에까지 전해질
전설이 되고 말겠지.
그분 덕에 잠시 무임으로 환상특급을 탔었다.
그 분이 서있던 부엉이바위 위에 내 몸을 세우고 뛰어
내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몇 글자의 유서까지 꼼꼼히 상상해보았다.
<제가 이것 밖에 못되어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얘들아
사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할거다.>
내 몸 이곳저곳에 열상과 골절로 피범벅 상처가 남겠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일겠지.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겁나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보살님께서 이룬 것이 뭐가 있나요?”
지난 날 언젠가 집을 떠나서 만나게 되었던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해놓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낳은 것 밖에는.
죽어서 끝이 아니라는데, 죽고 나면 억울한 것이 더
많다는데... 생각 많은 것을 타고났는지 죽은 후의 모습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썩을...
영예롭지는 못할지언정 비겁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이로운 녀가 못될지언정 못쓸년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한때는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인간이란 자부심을 지니기도
했었다. 치기만만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도 했다.
다시 한 번 철딱서니를 상실해야 할 듯하다.
자취를 감춘 객기를 찾아 나서봐야겠다.
메마른 자신감을 물속에 담가놔야겠다.
잃어버린 자부심에 대하여 분실신고를 해야겠다.
해놓은 것 없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다.
나는 천하의 솔바람이었다.
나는 겂 없던 솔바람이었다.
나는 나를 제일로 여겼던 솔바람이었다.
예전의 솔바람을 찾아야겠다.
세상을 찝찝하게 떠날 수는 없다.
나도 전설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