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관에 계시던 어머님이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에 귀가하셨을 때
얼굴이 불그스름한 상태로 입은 귀에 걸려있었다.
그리곤 떡볶이를 담아 보냈던 빈 그릇을 개수대에 담아놓고 거실 바닥에
앉기가 무섭게 했던 말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
“오늘 아주 기분이 좋다. 다들 우리 다섯째 며느리가 해준 것
먹으면서 맛나다고 난리더라. 사탕도 싸가고 땅콩도 싸가고 떡도
맹글어주고... 매일 얻어먹었는데 오늘은 내 기가 살드라...“
30분도 체 되지 않은 시간에 하고 또 하시는 그 말에 4째 형수 후보와
시숙들이 웬 술을 그렇게 먹었냐는 타박들을 늘어놓았다. 어머님의 그런 행동과
말씀들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나의 안타까움을 커져만 갔다.
저녁때가 가까워질 쯤 4째 형수 후보의 아들이 광주에서 내려온 친구를
데리고 내가 앉아있던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옷을 입은 녀석 역시 불량기가 넘쳐흘렀다.
어른들이 계신 식구들끼리의 모임에 친구를 불러들인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것을 제 엄마한테 미리 허락을 받았다니 할 말이 없었다.
인사도 시키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 조카라는 녀석이나 첫 방문에 거리낌 없이
당당히 함께 지나친 친구 녀석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둘을 거실 밖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녀석들을 대놓고 꾸짖었다. 넷째형수 후보의 낯빛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막나가는 집안이라도
내가 있는 동안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집껏 소개와 정중한 인사까지 받아냈으며 다시 한 번 어른들이 계신
집안에서 불미스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용서치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친구 녀석이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나에 대한 얘기를 미리 전해들은 듯
처음엔 반항기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런 녀석과 눈싸움으로
신경전을 벌어지기도 했다. 기가 뒤늦게 꺾인 녀석을 포함해서 조카란 놈에게
일부러 늘어진 방 정리를 시켰고 주스를 엎은 바닥에 걸레질까지 시켰다.
등 뒤에서 심하게 나를 씹었을 녀석들이 나를 피해 옥상으로 자주 올라가곤
했다.
건장한 체격의 대식구들을 위한 음식은 푸짐히 만들어야 했다. 커다란 닭 두 마리로
닭볶음탕을 만들 때의 솥이 가마솥 수준이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들이 이뤄졌고
맛나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 뿌듯한 마음으로 연실 생겨나는 설거지거리들을 씻어내고
있을 때였다.
“씨팔!!! 술 처먹고 주정질하네!!! 아, 밥 먹고 있는데 왜 잔소리야!!!”
상에서 늦게까지 앉아있던 둘째시숙이 먹던 수저를 팽개치며 목청을 높였다.
그리곤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뭐랬다고 그러냐... 술 좀 조금만 먹으라는 말도 못한데?”
위축된 어머님의 말씀도 이어졌다. 곧 화장실에서 나온 시숙이 어머님께
‘제발 지랄 좀 그만 하쇼, 내가 참을래도 참을 수가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시댁에 내려갔을 적마다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둘째 시숙의 행동을
나무라는 자도 없었다. 투덜대는 것도 당사자가 없는 뒷자석에서 뿐이었다.
“어메는 그 성질 알면서 왜 자꾸 건든다요?”
넷째시숙이 넋이 빠져 앉아있는 어머님께 잔소리를 했다.
“그러게... 어메는 왜 그런다요?”
넷째형님 후보도 남편을 거들며 한마디 했다.
엄마라는 입장에서 매일 술로 사는 자식을 걱정해서 말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걸 탓하는 인간들이 또 내 속을 뒤집었다. 하지만 아직 수북이 남아있는
설거지에 열중하려고 애썼다.
모든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거실에서 근심으로 앉아있는 어머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쯤 밥 먹을 때 외에 종일토록 숙취로 누워있던 남편이 나오면서
역시 어머님께 한마디 했다.
“어메는 왜 형 성질 알면서 그런다요?”
그 역시 어머니를 탓하다니... 인간들이 모두 그 모양인 것이 나로썬 납득이
되질 않았다.
저희들도 자식을 키우며 늘어놓는 잔소리들이 보통 아니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참았던 화가 치솟았다.
“다들 왜 그래요?! 어머님이 뭘 잘못했다고?! 자식한테 걱정해서 말도
못하고 벙어리로 살라는 거예요? 자식이 무서워서 할 말도 못하고
살라는 거냐구요! 다들 나중에 자식들한테 아무 말도 못하고 살겠군요!“
발끈한 내 말에 남편이 자릴 피했고 곁에 앉아있던 넷째부부도 입을 닫았다.
그동안 봐왔던 둘째시숙은 내 남편과 성향이 똑같았다. 꼬투리 잡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 습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둘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모두 같은 피를 증명하듯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속으로 낳아 키운
어머님이시기에 더 잘 아실 자식들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런 탓에
더한 술을 퍼마시고 들어와서 주정을 해댈 둘째를 생각하고 걱정 됐는지
불안해하셨다.
“어머님, 저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올라가세요. 저희가
어머님 모시고 살게요.”
내 말에 어머님이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셨다.
-몇 개월 전이었다. 어머님이 화장실에서 넘어지면서 수술한 무릎이
겹질러지고 말았다고 했다. 통증이 심한 어머님이 수술을 받았던 병원을
찾기 위해 광주로 올라오셨지만 계실 곳이 마땅치가 않다는 말을 셋째형님이
내게 전해왔다. 마음 약한 내 약점을 때때로 자극시키는 그녀의 얍삽함을 알았고
미웠다. 취직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것이 벼슬인양 어떤 상황에서건 출근을
훈장처럼 내세웠다.
큰 형님은 얼마 전부터 무릎이 아파서 통원치료 받는 중이고 넷째형님 후보도
목 디스크라서 움직임이 힘들다고 했다는 말을 함께 전했다. 아무도 어머님을
반기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아직 병원을 찾지 못한 양반이 맞벌이로 살아가는
하나뿐인 막내딸인 고모네 빈집에서 계신다는 말에 나는 또 울컥하고 말았다.
밤을 꼬박 새워서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어머님을 모셔오라고 했다.
자식이 무려 일곱이나 있는데 모두들 도리질을 치고 있다면 그분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겠냐며 김치에다 밥을 먹더라도 우리가 모시자고 했더니
남편이 말같잖은 말을 한다며 발끈해서 대꾸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고심 끝에
결정한 마음이었다. 후에 분명 후회하게 될 것까지 감수하자고 마음먹었다.
남들은 혈육도 아닌 병든 노인들을 봉사로 모시기도 하는데 고작 시어머님 한분을
못 모신다는 것이 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결의가 무너지기 전에
천주교를 다니며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를 다닌다는 큰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을 모셔다 주면 제가 모시고 살게요, 따박따박 말씀드렸다.
그 말에 한동안 얼버무린 형님이었다. 그리곤 한다는 말이 어머님 당신이
서울에서 못 사실 거라고 속 깊은 듯 말했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는 것일까?
그들도 내가 살아온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형부이기도한 사촌시숙인 선영이 아빠의 모친인 입 싼 작은어머님이
바로 윗집에 살고 있었다. 그분은 결혼 전부터 나와 알고 지냈고 누구보다
내가 살아 온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시댁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은 몸이 부실해 보이는 나를 여러모로
어려워했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방에 내가 누우려 할 때 하신 말씀이
“무신 고생이냐? 있는 집 딸이 이렇게 없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하고...
너가 잘난 집에 고명딸이란 말 들었다. 호강하고 살았담서? 잠자리
불편하지 않냐?“ 셨다.
시댁식구들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까탈스럽지 않은 나를 그들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하지만 시댁에서 난 뜨거운
감자였을 것이다. 고분고분 내가 따르는 듯 했지만 때론 고집스레
굽힘없이 언행을 일삼고 마는 내가 탐탁치도 않았을 것이다. -
시누네 빈집에 어머님께서 묵고 계신다고 할 때부터 나는 어머님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내 의견을 친정엄마께도 말씀드렸었다.
‘내 딸을 며느리고 둔 니 시어머님은 복이다. 하지만...’ 하는 여운을
엄마가 남기셨지만 대놓고 반대를 하지 못하셨다.
그런 지난 상황이 있었기에 불안으로 불편해 보이는 어머님께 겁 없이 던진
나의 말이었다.
“내가 어찌 서울서 산다냐? 나 없으면 아들들 밥은 어쩐대?”
한동안 뜸을 들이셨던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님 안 계셔도 굶어죽지 않아요. 더 잘해서 드실 거에요. 아마...
맛난 반찬을 매일매일 못해드려도 따뜻한 밥을 끼니때마다 차려 드릴
테니까 저희랑 함께 올라가세요.“
“... 서울에서 답답해서 어찌 산다냐...”
“집근처에도 노인정 있어서 친구하실 분들 많아요. 누가 알아요, 어머님이
괜찮은 할아버지랑 만나서 데이트도 하게 되실지...“
“ㅎ ㅎ ㅎ... 별 소릴 다 한다. 난 걱정 말아라. 느그들 사는 것만도
짠한데 도와주지도 못하고... 늙은 것은 어쩌든지 산다. 느그들이나
잘 살아라.. 넌 사랑받고 살아서 정도 많고 그래서 애들도 바르게 잘 키우고
있잖냐... 넌 잘 살 거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마신 어머님과 나와의 대화에 곁에 앉아있던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중간에 방으로 들어간 남편도 그 후 조용히 방안에 있었다.
어머님과 말을 나눌 쯤 친정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딸래미 고생 많지? 힘내서 파이팅 어른들께 안부 전해줘라.>
어머님께 엄마의 안부 말씀을 전해드리니 감사하단다. 우리들을 늘
도와주고 있는 사돈에게 면목이 없으시다고도 했다. 당신께서는 아무도움
못줘서 미안하시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해마다 7남매에게 똑같이 참기름 한 병씩 주신 시어머님이셨다. 그런 어머님이
얼마 전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남편이 모시고 내려갔었다. 그때 남편이 올라오는
길에 호박고구마를 반 포대 보내셨던 것을 셋째형님과 반 나눴고 잘 먹었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리니 조금밖에 못 줬는데 그것을 또 나눠먹었냐고, 그럴 줄
알았으며 더 싸서 보낼 걸 그랬다고 아쉬움 담아 말씀하셨을 때 뒷말이
형제들 간에 우애 있이 지내는 것이 좋은 거라며 ‘잘했다’ 셨다.
-언젠가 아영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엄마, 외갓집에서는 우리한테 주는 것이 많은데 친할머니는 주는 것이
참기름뿐이에요?“
“외갓집 식구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지만 엄마는 친할머니가 주신 참기름
한 병도 어떤 것 못지않게 감사해. 아픈 몸으로 농사를 지셔서 참기름을
만들어 주시는 할머니는 그것이 최선일거야. 많이 힘드실 몸으로 그게
보통 일인 줄 알아?“
갑작스런 질문이었고 우습게 넘길 궁금증이 아니어서 성의껏 해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딸래미였다. 친정아버지께서 농사 지어주신 쌀로 지은
밥을 한 알만 흘려도 꾸중했던 까칠한 엄마 덕에 다 먹은 빈 그릇도 한번
더 확인하는 아이들은 내 말을 흘려버린 적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그 말
역시 깊이 세길 수 있길 바랬다. -
어머님께선 서울로 함께 올라가자는 내 성의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그날 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우리 가족 중에서 마지막으로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작스레 무리했던 삭신들이 쑤셨고 뱃속이 불편했다. 그런 고통을 안은 채로
어두운 방에 누워서 어머님과 좀 전까지 나눴던 얘기들을 되뇌어 생각했다.
서울생활이 답답해서 내 제의를 거절했을 어머님은 아니셨을 거란 생각이
미쳤다. 살가운 분은 못되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시는 어머님은
당신이 몸을 못 가눌 상태가 되어도 자식들에게 피해줄까 연락조차 못하실
분이셨다. 표현에 서툰 시어머니셨지만 못지않은 배려심을 갖고 계신 고집스런
시어머님을 생각하자 코끝이 찡해졌다.
“안되겠다. 몇 시간 자고 출발해야지...”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남편이 자는 줄 알았다가 뜻밖의 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당신 힘들어서 안 되겠어...”
고양이 쥐 생각한다고 시골 내려가서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던 사람이 별소리를
다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봤자 고작해야 이틀이야. 함께 올라가자고 해도 안 가신다는 분,
아침은 챙겨드리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4째 형수 병원에 입원하러 새벽같이
올라간다더만 우리라도 아침상에 함께 있어 드릴거야...“
그리고 대꾸가 없던 남편이었다. 나 역시 적막한 어둠속에서 잠이 들려고 했다.
그럴 쯤 둘째시숙이 들어오는 듯 했다. 어두워진 집안 거실에서 시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성을 잃은 듯 목청을 높였다.
“밥 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왜 자꾸만 지랄이냐고!!!”
“......”
“내가 돈을 못 번다고 우습게 보이요?”
“......”
시숙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쪽 종자가 그렇듯 남편의 형 역시
2시간을 고수할 판인 듯 했다.
“내 꼴 보기 싫으면 집 짓을 때 들어 간 내 돈 내 놓으시오. 당장 나갈 틴께!”
“......”
전에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 듣기로 둘째시숙의 술주정으로 어머님이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 기억에도 둘째시숙을 말리다가 땅바닥에
힘없이 뒹굴던 나약한 어머님이 있다.
돈벌이 괜찮을 때 용돈 잘 주고 몸에 좋은 약까지 챙겨주던 정 많은 둘째였다지만
패륜 또한 일삼는 그가 내게 더 이상 어머님의 자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씨팔, 당신은 어메도 아냐! 돈만 알았지. 내가 담배 값 좀 달라며 사니까
우습소? 동네 사람들이 당신보고 뭐라는지 아요? 돈만 아는 인간이랍디다“
“어떤 년이 그런 개소리를 한다냐?”
못들은 척 입을 닫고 있던 어머니께서 드디어 참지 못하고 대꾸하셨다.
하긴 억지소리 하는데 장사는 없을 것이다. 벙어리도 입을 열지 않고 못 배길
염장 지르는 소리들에 발끈해진 나도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당장 나가서 따져 들고 싶었다. 당신 사람이 맞느냐고 나 역시 짐승보다
못한 인간에게 지랄 떨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시골에서 살다가 죽겠다며
불효막심한 자식들 밥상 챙겨줘야 한다며 버티시는 어머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 걱정을 묵살할 수도 없었다.
“당신이 어메요?”
“그럼 뭐다냐? 내가 어메 아니면...?”
“왜 살어? 그렇게 살고 잡소?”
“니는 내가 콱 뒤져버렸으면 쓰겄지...”
“늙은 주제에 술이나 처먹고 잘 하는 짓이다!”
“그러는 니는 안 그런대?”
모자간에 결코 오갈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 상황을 자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끈 치솟는 화가 내 숨소리를 거칠게
만들었다.
“짐 싸라. 가자, 화난다고 나서지도 말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남편이 곧 뛰어나갈 듯 참고 있는 내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께 폭력도 행사할 분위기로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죽은 듯 잠에 빠져버린 두 아이들을 깨우며 어둔 방안에 불을 밝혔다.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그 싸움을 일단락 짓기 위해선 우리들의 과단성 있는
행동이 필요할 것도 같았다. 소란스런 거실을 가로질러 짐 가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침 튀기며 열을 올리고 있던 시숙을 대놓고 무시하고 지나쳐 다녔다.
잠에 취한 아이들에게도 빼놓은 짐이 없는지 챙기라고 했다. 우리들의 행동에
어머님 곁에서 누워있던 넷째시숙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둘째시숙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때문에 왜 매일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해요? 오랜만에 동생가족이
왔는데 이런 소란을 꼭 피워야겠소?“
“......”
그들이 나누는 얘기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급하게 짐을 챙겨 문밖을
나서기 전에 동상처럼 몸이 굳은 채로 앉아있는 어머님 곁으로 다가가서
미리 줬다면 손자들에게 퍼주고 없을 것이 걱정되어 올라갈 때 슬그머니
드리려던 돈 봉투를 손에 쥐어드렸다. 어머님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어떤 말도 못하시는 분께 나 역시 잘 계시라는 인사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어린애를 강가에 내놓은 것 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오른 우리 곁으로
넷째 부부가 따라 나왔다. 그러고 그냥가면 더 난리 칠거라며 잡는 넷째형수
후보의 말을 묵살하며 나는 인사말만 건넸다.
남편이 형수후보에게 작은 아이 옷 한 벌 사 입히라며 돈을 건넸고 그녀는
살짝 빼는 듯 하더니 받아 챙겼다.
그곳을 떠나며 남편에게 따져들었다. 뭣 하러 돈을 주느냐고, 차라리 그럴 돈
어머님께 더 드리지 그랬느냐고... 난 그녀에게 돈 천원도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들의 갑작스런 행동으로 소란이 마무리가 됐을지
아니면 더한 소란이 빚어졌을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편치 않을 어머님의
처지가 떠올라 내 눈에선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남편이 말하길 어차피 아이들에게 몇 만원씩 쥐어줘도 십 만원이 넘었을 거라며
생각이 있어서 십만원만 줬다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들을 변명처럼 늘어놓았고
난 귓등으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야 웬수같은 남편에게 당하고 사는 더런 인생이라지만 어머님은
남편도 일찍 여의고 그 연세가 되도록 자식한테까지 수모를 겪고 사셔야
한다는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비참할 어머님의 마음이 헤어려지는 듯
했다.
우리가 출발한 시간이 새벽 12시쯤이었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지
끝내는 남편의 말대로 새벽에 출발하고야 말았다. 자다 말고 불똥
튀기고 만 아이들이 뒷자리에서 불편하게 잠든 것이 신경 쓰여 중간에
세워달라고 했다.
아빈이에게 앞자리에서 의자를 뒤로 눕혀서 자라며 양보하고 아영이 곁으로
가서 내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한결 편안하게 잠든 녀석들을 바라보며
어미된 마음이 모두 이럴 텐데,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며 키워준
어머니께 효도는 못할망정 패륜은 아니 될 말이었다.
두고 온 어머님 생각에 잠겨서 잠들지 못하는 내게
남편이 자상한 남편처럼 ‘당신 힘들어서 어떡하냐...’며 간간히 말을 건넸고
자식들이 아니라 상전이라며 잠든 아이들을 향해서 잔소리도 늘어놓았다.
뻥 뚫린 도로를 날듯 달려 친정과 20분 거리인 행당도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이 3시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 남편에게 2시간만 더 버티자고 했다.
그 시간에 친정에 들어간다면 너무 일찍 잠에서 깨게 될 부모님을 생각
하자고 했다. 출근을 위해서 보통 5시에 일어나시는 엄마와 예민한
성격에 한번 깬 잠을 다시 들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조금만 우리가
참자고 했다. 내 제의에 남편이 말했다.
“고작 2시간정도 일찍 일어나는 건데 그냥 가는 것이 났지 않아?”
“고작 2시간이면 얼마야, 자기가 나한테 깨워 달라고 했던 시간에 깨우면
10분만 더 자자면서. 10분 더 자면 피곤이 풀리냐니 그렇다고 했던
사람이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의 십 분은 간절하고 다른 사람의 2시간은
우스워?“
“......”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맛난 아침을 먹자는 내 제의를 깨고 남편이
아이들과 우동을 먹겠다며 휴게소로 들어갔을 때 꼬박 이틀 동안
5시간도 잠들지 못한 잠을 자려고 남아있었다. 남편의 고집에
끝내 우동국물을 마셔야했기에 무산된 잠이었지만...
친정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5시가 조금 못 미쳤을 때였다. 마당에 있던
잡종견 <이쁜이>의 소란 덕에 좀 더 차에서 버티고 있으려던 배려가 역시
무산되어 부모님을 깨우고 말았다. 포근한 집안에 들어서자 잠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겪은 상황을 전혀 모를 친정 부모님... 이른 시간에 방문이
웬일이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들 학원수업을 핑계로 들어야했다.
우리들이 휴게소에서 분식으로 뱃속을 달랜 것을 모르는 엄마가 시장할
새끼들을 위한 이른 아침을 차리기 위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셨다.
나는 엄마가 출근하고 난 후에야 늦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길에 들른 친정에서 있던 시간은 5시간가량...
아쉬워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챙겨주신 먹거리를 가득실고
서울로 향했다.
해가 떨어진 시간에 낮에 통화할 때 밖으로 나가셨다는 어머님과
통화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다시 전화를 드렸다. 목소리가 더 작아지신
어머님이 곧 받으셨다. (다행이 우리가 떠나고 나서 곧 소란이 끝났다는
조카 딸의 말을 듣을 수 있었다.)
“어머님, 저희 잘 올라왔어요.”
“그래... 그러고 올라가서 어쩐대...그리고 무신 돈을 그리 많이
줬다냐...환장하겄다...“
“어머님 그 돈으로 딴데 쓰시지 말고 꼭 한제 더 드시고 싶다던
한약 지어서 드셔야 해요. 꼭이요.“
“알았다. 내가 한약 먹고 기운 낼 란다. 오늘은 회관에도 잠깐만 있었다.
망신스러워서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밭에서 일 좀하고 왔다...“
“그러게 제가 서울 올라가시자니까... 지금이라도 모시러 갈까요?”
“나는 괜찮다, 걱정 말그라...아빈 어메야...”
“예...”
“고맙다... 그렇게 올라갔다고 다신 안 내려오지 않겠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메 보러 와야 쓴다... 내가 죽으면 보고 잡아도
못 봐야...“
“그럼요... 제가 어머님 뵈러 또 가지 안가겠어요... 어머님도 저를
보기 전까지 속상해도 식사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 내 꼭 밥 챙겨 먹을란다. 약도 먹고...”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제리를 조만간에 잔뜩 사서 보낼 게요.
기다리세요...“
“됐다. 느그 애들이나 잘 챙겨 먹여야. 엄한테 돈쓰지 말고...”
아침 식사까지 챙겨드리고 왔더라면 덜 아쉬웠을 텐데...
내가 더 이상 안찾게 될까봐 두려운 듯 ‘꼭 다시 와야 쓴다’고 말씀하신 어머님의
말씀 여운이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귓가를 떠돌아 다녔다.
모르겠다. 혹여 어머님이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 누워 똥오줌도 못 가리는
상태가 된다면 요양원에 모실 형편도 못되는 자식들이 나몰라라 서로 빼려고
아우성을 치게 될 때가 온다면 약지 못한 내가 그 덤탱이를 혼자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덤탱이 속에서 더한 고통으로 눈물 바람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내가 남편 곁에서 견디고 있게 된다면 나만은 빼지 않을 생각이다.
몸이 고되게 노동을 하고 왔지만 할 도리를 했던 상황에서 마음만은
좀 홀가분했던 순간이 끝까지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지난 그날이 지금까지 내 뇌리에 남아
찝찝한 여운으로 있어야 했다.
나와 어머님, 그리고 형님들... 비련의 여인들의 전생의 인연이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내 행동만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나만이
독단적인 흐름으로 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함께 협심할 수 있는 동서지간
이었으면 좋겠다. 형제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머님께 꼭 돌아가시기 전에 비행기를 태워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