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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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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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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러 안 올래?(2)


BY 솔바람소리 2009-02-03

밤새 뜬 눈으로 TV 앞을 지켰다. 그리고 남편이 그 상황을 보고도 장거리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라며 또 다음을 기약하는 소리를

해댔지만 나는 선뜻 문 앞에 싸놓은 짐을 풀지 못했다.

 

결국 가지 못한 명절을 수원에서 올라 온 막내시동생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꼬박 하루가 넘도록 어머님께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해서 어머님께 가버라는 부탁을 하고 나서야

연결이 이뤄졌다.

통화가 되기 전까지 난 별별 생각들로 불안했던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었다.

 

온다고 했던 자식이 오지 않자 섭섭한 어머님이 전화 코드를

뽑아 버리셨나?

아니면 기다리다 지쳐서 쓰러지셨나?

 

다행이 내가 걱정했던 일은 괜한 기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쩍 친구들과 비밀스런 통화가 많아진 조카가 벨소리를 줄여놓은

통에 벨이 울리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얼마 전에 두 무릎 연골이 모두 닳아버린 어머님이 수술을 받고나서야

통증은 가셨다지만 부쩍 쇠약해진 몸에 입맛마저 잃었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젊은 사람들도 수술하고 난 후에 회복기간이 힘겨운데 어머님은 오죽할까,

통화 때마다 느껴지는 건 어머님 목소리 톤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출발하지 못했다며 죄송하다고 했더니 기력 빠진 목소리로

잘했다고 하셨다.

다른 집들도 출발했다가 되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다며 서울은 멈춘 눈이

아직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며 어쩌겠느냐고, 늙은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젊은 우리들이나 아이들과 잘 살라고 말씀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라는 죄 많은 사람은 평생을 자식 걱정만 하다가

떠나는가보다고... 자식들이 인정하든 말든, 잘 키웠던 못 키웠던, 나름

마음을 다해서 키웠을 ‘엄마’였을 것이다. 어머님도...

 

전화를 끊고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순전히 우리들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지, 어머님 돌아가시고 나면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분이시다, 남들이 명절 날마다 하는 고생도

분명 부러울 날이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다음에 눈물을 흘려봐야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방학동안 아이들과 어디 놀러간 적 없으니까

여행 삼아 슬슬 다녀온다고 생각하자, 이것도 교육이다, 학교 교과서만이

공부냐, 부모를 잘 섬기는 자식 밑에서 효자효녀가 나온다고 하지 않느냐,

나중에 우리들이 늙어서 자식들을 기다리는 때가 왔을 때, 그동안 우리들이

댔던 핑계를 대고 자식이 찾지 않을 때 당신은 결코 섭섭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평소처럼 ‘알았어’만 되풀이 하는 남편 곁에서 계속 주절거렸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다음날 출발하자는 내 성화에 수긍하는 남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마음이 다시 바뀌게 될까봐 부리나케 풀어놓았던

짐을 챙겨놓았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잠이 깬 나는 냉장고를 뒤져서 어머님께 가져갈 밑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연휴 마지막 날의 출발,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모를 여정이었다.

아이들이 다녀와서 빼먹은 학원수업의 보충을 걱정하는 말에 우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늙으신 할머니만 생각하자고 다독였다.

나 역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떠오르는 걱정들이 있었고 가라앉혀야 했다.

시댁에 내려갈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서 술에 빠져 외박을 해대던 남편을

각오해야 했다.

둘째 시숙과 어머님이 계신 곳에서 삼시 세끼를 며칠동안 밥을 해대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가는 만큼 그동안 못해드린 것을 한꺼번에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대접해드리고 오자고 홀로 다짐해야 했다.

분명 내가 각오한 것보다 더 힘겨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도 감수하자고 혼자서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눈들이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사라져갔다.

들판에 초록으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타이머신을 타고 계절을 넘나든 것처럼, 몇 시간을 달렸을 뿐인데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들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체가 심한 상행선과 대조되는 하행선이 뻥 뚫려있었다.

 

서울서 출발한지 6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시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처음 맞은 것은 술독에 빠져 산다는 것을 증명하듯

붉은 코의 둘째 시숙님이셨다. 그 뒤로 세월 속에 모진고생들을 깊이 심긴 듯

주름진 얼굴의 어머님이 힘겹게 걸어 나오셨다.

나는 부산스런 다섯째 며느리가 되어 싸늘한 온도의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들과 때늦은 세배를 드렸다.

그리고 준비해간 것들을 꺼내놓았다. 먼저 마을 회관에서 노인 분들과

어울려 지낼 때가 많은 것을 염두하고 준비했던 여러 종류의 사탕들을

꺼내놓으니 어머님 입이 귀에 걸리셨다.

 

“그렇잖아도 다들 자식들이 사왔다며 먹을 걸 들고 오면 나는 매일

얻어먹으면서 미안했는데 잘됐다. 자랑해야 쓰겄다.“

 

친정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나이 먹어보니 기 펼 수 있는 것이 자식 자랑

할 때라고... 제한된 날이라도 어머님께 자랑꺼리를 제공해드리고 싶었다.

 

몇 해 전에 내려갔을 적에 떡볶이를 만들어준 내게 어머님은 그런 것을 처음

먹어 본다며 음식 이름이 뭐냐고 물으신 적도 있었다.

수술하고 병원에 누워계실 때 이가 부실한 어머니를 위해서 과일 통조림을 잔뜩

싸들고 간 내게 그런 것을 누가 먹는다고 사들고 왔냐며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나를 타박하셨던 분이 그것을 맛보고 나서야 ‘맛나다’며 하루 만에 모두 드시고

하신 말씀도 처음 먹어본다는 거였다.

흔하디흔한 떡볶이와 과일 통조림을 처음 드셔보셨다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뿌듯한 마음 한편으로 들던 안쓰러움이었다.

 

친정아버지께서 농사지어서 주셨던 땅콩의 반을 덜어간 것을 꺼내서

동네 어른들과 함께 드시라며 덜어내며 후라이팬에 볶아내는 내 곁으로

다가오셔서 밭에 심겨보게 조금만 남겨놓으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고 있을 때 4째 시숙님이 ‘처’라고 칭하는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아빈이와 동갑인 시숙님의 씨 다른 아들과 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 그리고 전처

사이에서 낳은 큰 딸이 함께 북적이며 들어섰다.

함께 산지 6년이 다 되어가는 시숙님의 ‘처’에게 형님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했던

나였다. 그런 나를 남편이 나무랬었다.

어쨌든 아이를 낳고 함께 몸을 섞고 사는 여자에게 이젠 형님이라고 불러야함을

머리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선뜻 따라주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시댁과 생판 남인 그녀가 당당하게 집안으로 들어섰고

머지않아 술판이 벌어졌다.

완도가 친정이라는 그녀가 광주에서 그곳으로 내려가 있었는지 냉동시킨

전어를 썰어내는 내내 완도에서 가져 온 만원에 50마리 한다는 말뿐이었다.

둘째, 넷째, 다섯째인 형제들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며 내내 ‘싸고 맛있다’를

연발하며 술잔 기울이기에 여념 없었다.

내게 술을 권하는 시숙들의 성화에 곁에서 콩나물을 다듬는 어머니

곁에서 사양을 해대야 했지만 고집스런 분위기에 석 잔을 받아 마셨다.

뭐가 불만인지 권하는 술을 서슴없이 받아 마시던 넷째 형님 후보가

취기가 올랐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속았당게요. 처음 이이를 만났을 때 자상한 줄 알았는데

사람이 정이 없더만요...내가 억수로 속았당께...

혼인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뭣 하러 그 고생을 하느냐고 주변에서

날립디다...

어머니가 다슬이(5살 어린 딸) 좀 키우쇼. 내가 허리 디스크 땜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나왔는디 연휴 끝나고 다시 들어가서 누워

있어야 하는디 여간 이 가시나가 걸리는 것이 아니당께요...“

 

나보다 딱 10살이 많은 그녀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철딱서니도

없었다.

 

어머니이 병원에서 수술하고 누워있을 때 들른 적 없던 여자가 그걸

말이라고 했다. 연로하고 쇠약한 몸으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시어머님 되시는 분께 그걸 입이라고 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정식 며느리가 아닌 그녀가 보따리 싸서 도망가면 아들이 홀아비가

될까봐 두려운 듯 박복한 분이 부산스런 손녀딸을 봐준다고 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속이 뒤틀렸지만 내가 반감된 마음으로 그녀에게

맞선다고 해서 벌어질 뒷 상황이 결코 어머님을 위한 것인지, 또 집안의

평화를 지킨다고 자신할 수 없어서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술자리가 깊어질수록 어머님의 얼굴이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먼저 자리를 뜬 것은 남편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그를

미리 각오했던 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 있었다.

두 번째로 자리를 뜬 것은 넷째 시숙님이었다. 비틀거리는 분이

차까지 끌고 나갔다. 그때부터 그의 ‘처’가 또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진 넷째 시숙이 술에 걸신 든 사람처럼 계속해서 마셔댔다.

혀가 말렸고 했던 말을 하고 또 해대기 시작했다.

3명이서 마신 술병이 6병이었고 4째 시숙 ‘처’가 마신 것이 한 병이었다.

그리고 둘째 시숙이 혼자 마신 술이 우습게 두병을 더 넘기고 나서야

술상을 치울 수 있었다.

 

“또 마시냐?”

 

그 말씀만 반복하시는 어머님의 얼굴이 점점 불안으로 변해갔다.

둘째 시숙의 주사는 모두가 알아준다는 소문난 경지였다.

어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질머리였다. 우습게도 둘째 시숙은

그런 상황을 즐기는 듯도 했다.

 

그 시숙과 내겐 기억에 남을 일화가 몇 가지 있다.

 

신혼 초에 한 성질 한다는 자신을 자랑스레 내게 떠든 시숙...

결혼해서 내려갔던 첫 제사에 큰 시숙과 형수에게 불만이 있던 둘째 시숙이

제사가 끝난 한밤중에 병을 깨서 소란을 피웠고 칼을 들고 설쳤을 때 그것을 말리는

어머니가 땅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고 놀란 마음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던 나였다.

큰 시숙과 형님이 몸을 피했고 다른 형제들도 모습을 감춘 집안에 낯선 곳에서

홀로 남겨진 것은 나뿐이었다.

밤새 술을 마시는 둘째 시숙의 술상대로 앉아있어야 했다.

간간히 집을 때려 부순다는 협박을 해대는 시숙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난 피하지

않았다. 한참 어린 제수씨가 기죽지 않고 따라주는 술을 시숙은 받아 마셨다.

따박따박 내가 말상대를 해주는 것이 시숙은 싫지 않은 듯 했다.

그 시숙이 내게 말했다. 자신이 난동을 부렸을 때 곁에 있던 사람이 없었다고.

내가 대답했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겁 따위는 나지 않는다고...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기고 살았기에 누구에게 건 주눅 들어 산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비굴한

나라고...시숙님의 행동에 크게 실망했다고...

 

그리고 또 몇 해가 흘렀을까, 부엌일에 차마 돌보지 못했던 아빈이가

칭얼대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때려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시숙 앞에서

이성을 잃은 내가 아빈이를 때려잡고 말았다. 포악으로 반 미친 내가

왜 울고 지랄이냐며 널부러진 녀석을 때리고 또 때렸을 때 둘째 시숙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뒤로 내 아이들에게 그 시숙은 뭐라고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누군가가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면 역성을 들기도 했었다.

 

또 몇 해가 흘렀을까, 백수로 술만 마신다는 시숙의 술친구가 되어줬던

내가 시숙에게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좋은 기술 썩히지 말고

몸을 아끼시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를 두려워해서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고

외로운 듯 보였기에 오히려 나는 시숙에게 다가가려고 했었다.

올라오던 길에 몰래 시숙의 점퍼 속에 돈 십 만원과 글 몇 자 적은 쪽지를

넣고 왔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더 챙겨드리고 싶었어요. 얼마돼지 않는 돈이지만

드시고 싶은 음식 좀 사서 드세요. 오늘 이후로 시숙님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바람대로 머지않아 시숙님이 술을 끊고 열심히 일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또 몇 해가

흘렀을까 아빈이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수중에 돈이 없었지만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둘째 시숙이었다. 염치가 없어서 문자를 보냈다.

 

<여유가 된다면 20만원만 빌려주시겠어요? 곧 갚겠습니다.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시될 수도 있을 거라고 여기며 보냈던 문자에 당장 연락을 주신

둘째 시숙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빈이가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한다는 상황을 설명하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염치없어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빠른 시일 안에 갚겠다고 했다.

그리고 확인한 통장에 80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놀란 나는 당장 시숙님께 전화를 드렸다. 금액이 잘못됐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 말에 시숙님이 더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며 전에 받은 것 갚았다고 생각하고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계산할게

없는 거라고 여기자고 했다. 그날 감사하기도 했던 마음 반면 베풀 때와 다른

비굴한 심정이 들었던 나였다.

 

그 후 시숙은 3년 안에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고 우리들은 부주로 총 80만원을

마련해 드렸었다.

짧은 결혼 생활들을 맞았지만 어쨌든 용접공이던 시숙님의 벌이가 괜찮았고

나름은 봄날의 평온함을 즐긴 적이 있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서 지내고 있는 것을 나는 또 접해야만

했고  마음과 머리가 심란함으로 묵직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어쩌면 둘째 시숙과 내게 또다른 일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