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6시간을 잡아먹는 장거리 학원행이었지만 썩 괜찮았다. 붙임성만큼은
타고난 듯, 강사와 또래, 선배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왁스로 반지를 디자인했고 팔찌를 깎아냈으며 목걸이의 메달을 디자인 하는
내 능력에 자아도취 되기도 했다. 매일 선만 긋던 데생이
컵, 칫솔, 라면, 컵, 주전자, 인물... 단계별로 배운 그림이 어느 순간
명암을 넣고 표현하니 흑백사진처럼 모양을 그대로 그려내던 것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학원에 있는 동안은 그것들에 전념하려고 했고 그래서 잡념들을
잠시 잊을 수가 있었다. 잠시 동안만...
새벽 6시발 첫차를 타고 집을 나서곤 했다. 서울서 읍내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 때가 보통 오후 4시쯤이었다.
밤마다 창문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던 사돈이 잠근 창문을 열기 위해
애를 썼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피곤에 지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렇게 사돈을 보지 못한 며칠이 되었고 그런 날이 계속 되기를
바랬다. 언젠가 언니는 사돈이 동네에서도 내놓은 건달 중에 상 건달인
나보다 나이가 5살 정도 많은 용남이와 어울린다며 걱정했었다.
용남이라면 중학교시절 퇴학을 당했고 소년원을 몇 번 다녀왔으며 성년이
된 이후 감방까지 다녀왔다는 전적이 화려한 마을의 문제덩어리로 얼굴
한쪽이 칼로 크게 베인 자국이 흉측하게 남아있던 백수였다.
언니의 넋두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던 어느 날,
읍내 터미널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내 앞으로 사돈의 트럭이
다가와 섰다. 그가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미리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홍길동처럼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던 그였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낡은 트럭에 앉아있던 사돈이 무언의
눈빛으로 어서 타라며 고집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놈의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처음엔 눈이 부신 흰색 츄리닝이었을지도
모를 그 옷은 연한 아이보리색을 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발에는 낡은
흰색 운동화가 신겨져있겠지, 신경전을 벌여봐야 남들의 이목만 끌뿐이기에
체념하며 그의 차에 오르기 전, 그런 짐작을 했었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음을 확인했다.
보일러실 문 앞에서 봤던 날 이후로?... 사실, 나도 헷갈린다...
어쩌면 내 몸을 뺏으려 했던 첫날 이후로?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어쨌든 언젠가부터 그는 늘 내게 심통 난 사람처럼 굴었다.
적반하장처럼 말이다. 내 삶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린 주제에 오히려 늘 내게 심통이
나있는 것은 그였다. 또 그는 무슨 심보인지 가진 자들을 경멸했다.
못 가진 자의 시기처럼... 그들이 자기 것을 뺏은 것처럼 가진 자들을
미워했다. 노골적으로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마을에서 부유한 측에 속했던
내 아버지도 탐탁지 않은 듯 했다. 우습게도...
나를 태우고 달리는 차의 방향이 집의 반대방향이었다. 지나치던 길가에
민혁의 빌라도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고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평택으로 나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왜 그쪽으로 가느냐고 또 물으니
배가 고프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직 저녁식사는 이른 때였다.
그 시간에 배가 고프다면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말인가? 배가 고프면 읍내에도
식당이 많은데 굳이 왜 평택까지 나가?, 평소의 나라면 따지고 물었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 나는 평소의 내가 될 수가 없었다. 천지(天地)처럼
격이 다른 그와의 대화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달랐고 말 또한 타국사람처럼
소통이 원활하지도 않았다. 그냥 입을 닫고 있는 편이 속이 덜 시끄러울 것만
같았다.
평택 시내를 돌던 그가 자기 마음대로 차를 세우더니 어느 분식점으로
도망칠 것을 미연에 방지하듯 아무렇게나 내 한쪽 팔을 잡고 들어가
앉았다. 그리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돌솥비빔밥이라니... 학창시절에나 먹던
음식이었다. 졸업하곤 먹으려고 생각했던 적이 없던 메뉴였다.
하긴 난 분식점 자체를 들르지 않았었다.
“왜 내게 어디 다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음식을 기다리던 중 다짜고짜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난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난 함구했다. 입이 아플 것 같아서...
“내가 밤마다 불러도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왜 자꾸만 나를
피합니까? 아직도 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전히 심통 난 듯 입을 열고 있었다.
아직도? 그 말이 자꾸만 내 귀를 맴돌았다. 메아리치며 둥둥 떠다녔다.
남들 이목을 중요시 여기는 내 약점을 잘도 파악해서 나를 범했고
그로 인해 원치 않은 아이를 갖게 됐고 낙태를 했던 나를 또 범했던
남자가 떳떳하게 그 일을 상기시키듯 ‘아직도’를 운운하는 뻔뻔함을
원망하며 나는 벙어리처럼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생긴 것만은 너무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리 빛 피부에
속눈썹이 긴 눈엔 쌍꺼풀까지 또렷이 알맞은 크기의 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콧날도 낮지 않았다. 입술도 뚜렷한 선을 하고 있었고 섹시에
가까운 도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 180cm를 넘는 가족들의 남자
신장에 비해 작긴 했지만 그는 평균을 유지하는 키와 몸매를 갖고 있었다.
츄리닝과 운동화 차림이 아닌 근사한 양복과 그에 걸맞는 신발까지 갖추었다면
참 근사할 수도 있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궁핍한 삶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동성동본만 아니라면 내게 향한 그의 집착을 두려워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부유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이었다면 그토록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여자의 몸뚱이를 함부로 유린해서도 안된다는 것쯤
교육받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의 어떤 말에도 난 함구했고 그럴 때 음식이 내어졌다. 지글지글 바닥이
눌러 붙는 음향을 지닌 돌솥비빔밥을 능숙하게 비벼대는 것을 난 그저 막연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로.
난 스스로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한 이기적인
사돈 앞에서 내 이기적인 행동으로 마음 다쳤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반성까지
하곤 했다.
입과 몸이 굳은 듯이 앉아있는 나를 보지도 않고 밥을 비벼대던 사돈이 계속해서
나 따위 무시하고 저만 밥을 먹을 먹겠지, 생각하고 앉아있을 때 비벼진 돌솥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뜻밖이었다. 그 작은 배려가.
“먹어봐요. 어제 월급을 받았는데 밥을 사주고 싶었습니다. ”
그 순간, 그 말도 감동이었다. 그가 보일러실 문 앞에서 내게 했던
말 중, 돈을 벌면 보통은 대학 다니는 막둥이 학비에 보태라며 보내주었고
시골에 계신 엄마에게 보내주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이 삼십이
가깝도록 벌어놓은 돈이 없다고 말했었다.
돈이 생기면 지출될 곳이 많아서 자신이 쓸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입을 옷도 없고 신을 것도 마땅치 않다고 했었다.
언젠가 입었던 외출복인 허름한 양복도 친구가 입던 것을 줘서 입는 거라고,
묻지 않은 말들을 꺼내놓은 속에 있던 말이었다.
소중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내게 밥을 사려고 했다는 말이
내 한쪽 가슴을 찌르르르... 울리게 했다.
그 앞에서는 이성이란 놈이 분별력을 상실하는 듯,
그래서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그 순간...
입을 닫고 있던 내가 숟가락을 들자 그의 굳어있던 얼굴이 봄눈 녹듯
풀어졌다. 많이 부드러워진 표정의 그가 민혁처럼 알아서 곁들여 먹을
국물을 내 옆으로 밀어주었고 자상한 것처럼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래, 모르는 사람들뿐인데 어때, 잘 빼입은 여자와 엉성한 차림의 남자가
함께 밥을 먹는다고 흉보면 어때,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가 원하는 대로
있어주자.‘
나도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와 머리를 맞대고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내가 반에 반도 못 먹고 남긴 것을 그가 몽땅 긁어 먹는 것도 잠시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민혁이 내가 남긴 음식을 몽땅 먹어치우면 추잡하게 먹던 것을 먹는다고
타박하던 내가 사돈에게는 다른 마음과 눈을 지닌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었다.
분식점을 나온 그가 전자제품 대리점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최신 마이마이를 달라고 했다.
일기장 속에
(나를 범했던 첫 날, 동생과 장난치던 그가 내방 침실에
불쑥 동생과 들어와서 쓰고 있던 일기장을 뺏어 읽었었다.
친구들에게 받았던 선물과 즐겁게 보냈던 나날, 민혁과 다녔던 곳과
그가 줬던 선물들, 민혁에게 받았던 갑작스런 키스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일기장을 훑어보던 그가 일기장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을 때, 막내
동생이 곁에서 장난치는 줄 알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날 내게 했던 사돈의 키스는 민혁 입술의 흔적을 닦아내려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골기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냐고 오기를 팠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쓰여 있던, 몇 년 전 일본에 다녀왔던 작은 아버지가
선물로 줬던 뭉뚝한 소니사의 미니카세트 말고 산뜻하니 슬림한 소형 마이마이가
갖고 싶다고 써놨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 말려도 듣지 않고 고가의
휴대용카세트를 사서는 내게 멋과 분위기를 쌈 싸먹은 것처럼 대뜸 디밀었다.
내가 선뜻 받지 않자 거칠게 내 손을 끌어다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 점원이 곁에서 웃으며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뭐해요? 이거 갖고 싶다면서. 금방 실증 느끼지 말고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갖고 쓰쇼.“ 라고도 했다.
모든 것이 민혁과 사뭇 다른 사돈이었다. 받을 수 없는 부담스런 선물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밥을 먹고 마이마이를 사기까지 걸린 시간이 2시간 가까이 소비되었다.
벌써 집에 들어갔어야 하는 시간에도 그는 집이 아닌 외딴 시골길을 들어가
으슥한 산길을 찾아들어갔다. 잠시 평온했던 마음이 지옥이 되는 것도
순간이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가 어스름해질 쯤,
알지도 못하는 동네로 접어들어 숲길을 찾기에 급급한 그를 보며 난 또
분노가 일었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두렵진 않았다. 차라리 아무도 없이 둘만 있는 것이
다행처럼 여겨졌다.
그가 한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두르고 자신 쪽으로 당겼지만 난 손잡이를
잡으며 완강히 버텼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그가 선물한 카세트를 가방 속에서
꺼내서 그의 무릎 위로 던지다 시피 건넸다.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오늘 확실히 말하는데 난 창녀가 아니라구요!!!
왜 나한테 함부로 해요?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어요?!“
그동안 꼭 하고 싶던 말이었다. 꼭 따지고픈 마음이었다.
내 서슬 퍼런 눈빛과 말투에도 그는 참 덤덤히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 나를 민혁이 봤다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긴장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내가 그동안 만나지 못한 신경전에 강한
달인처럼 덤덤히 나를 대했다.
“창녀라고 내가 했습니까? 난 이모를 우습게보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뿐이지.“
“사랑하면 무턱대고 여자 몸부터 갈취해요?! 내게 한번 아픔을 줬으면
그만 뒀어야지요! 왜 자꾸만 이래요? 내게 또 뭔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내가 바라는 밥니다. 왜 애를 떴어요? 애가 있었다면 차라리 더 쉬웠을
텐데!“
낙태한 아기 얘기에 그도 발끈했다. 이상한 사고를 지닌 그는 내가
애를 갖고 있다면 차라리 쉽다고 말을 했고 난 내 귀를 의심하고만 싶었다.
“난, 삼촌을 사랑하지 않아요! 알아요? 삼촌 생각과 상관없이 난
아니라구요! 그리고 난 결코 삼촌이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자 몸이 그리운 거겠지요! 여자에 미친...“
입에 거품을 물며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는 내 입을
사돈이 또 자신의 입으로 막고 나섰다. 참 간단한 방법이었다.
내 입을 닫기에 제일 적절한 것이 그에겐 그 방법뿐인 것처럼...
또 재방송처럼 난 뿌리치려했고 말짱 도루묵, 허사처럼 완강한
그의 힘에 제압당하며 곧 잠잠히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오늘 어떻게든 막을 내리려던 글이었다. 난 거두절미하고 글조차 유유히
흘려버리지 못하고 집착 속에 얽매여 이렇게 질질 끌고 가고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글이다. 계속 직진하기도, 후진하기도 벅찬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