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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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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삼촌(17)-난 너를 원치 않아...


BY 솔바람소리 2008-12-22

- 허접한 글재주로 표현하는 것도 벅찬 내가 남편과 얽히게 된 순간을

회상하며 그때를 고스란히 꺼내놓기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현재의 내가

순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힘겹지는 않았겠지... 지난날의

후회들이 물밀듯 밀려와 글이 나갈 길목을 자꾸만 막고 선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 길을  행진하는... 느낌이다. 멋을 낼 수도 없고 포장할 곳도

없다. 하긴...이럴 땐 <미사여구>조차 부러운 능력이다.

그 능력 없음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난 누굴 원망할 자격조차 없다.

내가 파논 구덩이 속에 빠진 주제가 입을 닫고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자꾸만 변명을 하고만 싶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순결>을 잃은 날, 나는 세상도 잃었다고 생각했다.

의도한 바 없던 괴팍한 남성을 내 몸속에 받아들이고 난 후... 빳빳이 누워

내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몇 년을 지냈던 내방 천장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불결을 입어버린 나와 대책 없는

사돈도 낯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 창창하지만

막막한 내 인생의 앞날을 계획하기가 찢긴 처녀막의 고통보다 힘겹게

했다. 좌절과 수치심으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휴지로 제 몸을 닦고

내 몸까지 닦아주고 위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내려다보는 사돈 앞에서

더 이상 비참하고 싶지 않은 나는 이를 물며 참아야 했다. 왜 그랬냐고

따지며 구차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쿨’하고 싶었다... 쿨...

그 추운 한겨울에 쿨하고만 싶었다...

 

“이모는 이제 내 여잡니다.”

 

사돈이 말했다. 그 순간... 그걸 내게 말이라고 그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 그의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우린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의 힘겹고 외롭다던 지난 고난들이 나로 하여금 그를

마음속으로 품게 했지만 그 연민이 사랑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전라도의 ‘라’자에 치를 떠는 부모님, 동성동본,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제 몸에

자해를 일삼는 선영이 아빠를 사촌 시숙으로 받들기...

어느 것 하나도 만만하지 않은 산이었고 뛰어 넘고 싶지 않은 높은 산이었다.

평소 산을 싫어하던 내가 차라리 히말리야를 슬리퍼 신고 올라갈지언정...

인간관계, 그 산을 뛰어 넘을 자신은 없었다.

 

“요즘 때가 어느 땐데 구닥다리같은 소리하고 있어요. 내가 먼저도

말했지만, 우린 안된다구...“

 

밀려드는 자괴감을 감추고 냉정하게 말했다. 여전히 나체로 누워서 미동도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움직이고 배에서 힘을 끌어 모아 소리를

만들어 냈다. 딱 죽고만 싶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앞으로 가족들을, 동네 사람들을, 하늘을, 바다를, 우리 집의 나무들을, 곁에서

떨고 있는 큐피(애견)를... 눈을 맞추며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슬픔, 분노, 좌절...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봤지만 죽을 때까지 ‘비굴’과는 친분을 쌓지 않을 줄 알았던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알게 된지 얼마 안되는 사돈 때문에 뇌리 깊게

'비굴함'을 명패처럼 새겨 넣게 되었다.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던 사돈이었을 테니, 내 마음 헤아릴 마음 또한

그에게는 사치였을 테지... 그런 그에게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사정 따위, 나 역시

하고 싶지 않았다. 배려 따위 눈 씻고 찾아 봐도 코딱지만큼도 없는 사돈이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거칠게 벗어던진 자신의 옷을 신경질적으로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려고 잡았던 문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여전히 나무토막처럼 꼼짝 않고

누워있는 나를 돌아봤다.

 

“난 분명이 말했습니다. 이모는 내 여잡니다. 함부로 행동하고 다니면

동네사람들에게 오늘 일 모두 알릴 테니 알아서 하쇼.“

 

그가 이죽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내 약점을 잡았다며, 칼자루는 제가 잡았다며, 여차하면 끝장난다며

그가 내게 협박을 했다. 나는 그 짧은 말에 다시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궁지에 몰린 심정이 되어 버린 내 마음...

그 비굴한 마음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연민으로 그를 바라봤었던 나를 밟아 죽이고 싶었다. 잠시 미쳤었던

나를 때려죽이고만 싶었다.

 

운석이 떨어져 지구가 쪽박 깨지듯 박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휴전을 유지하는 남북관계, 북한의 김일성이 3,8선을 밟고 쳐들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세상 끝을 보고 싶던 나날들이 너무나 태평하고 잠잠하게

돌아가며 시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머지않아 수원의

슈퍼를 정리하고 부모님이 집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또다시 밖으로 나갈 궁리를

시작했다.

 

악세사리 수집을 좋아하던 나는 취미를 살려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학원을 알아봤지만 가까운 평택 주변엔 없었고 서울 쪽에만 있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작은 아버지들에게 괜찮은 학원 좀 모색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사돈은 여전히 마을과 읍내에서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억지로 차에 태워

생전 가보지 않던 시골길 산비탈로 데려가서 경고와 협박을 일삼곤 했다.

하지만 선뜻 나를 어쩌지를 못했다. 부모님이 수원에서 내려오기 전...

우리는 한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난 그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났고, 민혁을 만났으며, 펜팔친구들까지

읍내에서 만나고 다녔다. 반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고 사돈에게 맞서고픈 오기가

발동해서 부지런을 떨며 놀러 다녔다. 그 당시... 사돈은 내게 위치추적 장치라도

부착한 것 마냥 일하다 말고 내가 있는 곳을 잘도 알고 찾아내서 흰색 트럭 속에서

협박담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며칠이 지난 어느 밤...

슈퍼에 들러서 집에 들어가려는 나를 억지로 차에 태우고 무작정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는 거냐는 내 말에 대답도 않고 카레이서처럼 속력을 내기위해

과속패달을 밟기만 했다. 사돈에게 나 역시 독이 올라있던 상태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디를 가는 건지 말을 하라면서 발악질을 떨었다.

겨우 입을 뗀 사돈의 목소리는 엔진소리에 묻힐 정도로 웅얼거리듯 작가만 했다.

 

“수원에 가서 사돈 어른들게 우리들의 관계를 말할 겁니다...”

“!!!”

 

나는 그의 배짱이 기가 막혔다. 우리 관계, 몸을 섞었다는 사실을 알리러 가겠다니...

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썬다고 해도 믿었고 알몸으로 밖을 돌아다녀도

내 몸뚱이 함부로 굴리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내 부모님께... 그 믿음에

도끼질을 하러 간다니... 그가 뇌가 있는 인간인가 의심스러웠다.

그건 세상 제일 사랑하는 내 엄마를 죽이는 일이 될 거고, 그렇잖아도 아버지께 주눅

들어 사는 내 엄마를 생매장까지 시킨다는 뜻이기도 함을 그가 알고나 하는 말일지

궁금했다.

 

암흑의 터널 속을 지나가듯 차를 타고 칠흑같은 벌판을 한참이나 달렸다.

내 아버지는 당신의 체면을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던 분이었다. 난 늘 아버지께

반감으로 맞서듯 대했다. 살아가며 아버지께 굽히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엄마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차 세우지 않으면 뛰어 내려요!”

“......”

 

내 경고에도 사돈은 차를 멈추지 않았다. 그 역시 오기를 발동해서 더한 속력을

내고 있었다. 차문을 잡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차, 세워요!!! 빈 말 아니에요!...’

그래도 내 말을 씹었다. 사돈이...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강한 바람에 문이 떨어질

것처럼 밖으로 튕기듯 열렸다. 그때서야 놀란 듯 속도를 낮춘 사돈은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고 차를 세우지 않았다. 열린 차문 밖으로 검정에 색이 묻힌 벌판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우리의 신경전은 그때부터 시작됐던 거였다. 고집스런 두 사람의 고단수 신경전...

17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그 긴 싸움에 나도, 남편도 이제는 많이 지쳤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벌어지는 그 날카로운 오기의 칼날은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시퍼렇게

무뎌지지 않고 살아있다. 세상에 어떤 원수 못지않게... 지난날들의 섭섭함까지

이자로  새끼까지 친 상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가는 날들이, 나로 하여금

나를 저주 받은 삶으로 종지부 찍게 만든다... 젠장할...육실헐...니이미로 쌈이나

싸먹어라. 욕이 모자를 지경으로 이런 인생길을 열어준 누군가를 된통 씹어주고

싶을 뿐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뜬금없이 효녀 심청이 되어있었다.

 

‘엄마... 나 먼저 가... 차라리,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엄마와 나를 위하는

걸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인당수에 빠진 효성 지극한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석이라도 아버지께 만들어

드렸지만, 못난 나는 부모님께 치욕과 마음고생만 태산을 만들어주고 죽는 것이

죄송해서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땅 위로 뛰어내렸다.

아스팔트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맘에 들지 않는지 공처럼

튕겨버리더니 내 몸을 제 맘대로 몇 바퀴를 돌려버렸다. 충격에 숨이 턱, 하고

막혔지만 어이없게도 세상은 여전히 내 눈 안으로 똑똑히 들어오고 있었다.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어둠에 묻힌 바람이 내 몸을

스치는 것도 보였다. 50m쯤 떨어져 굉음을 내며 멈춰선 사돈의 흰 트럭도 보였다.

그가 급하게 뛰어 오는 것도... 보였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왜 보이는 걸까... 의식도 멀쩡했다. 수술 받은 허리에 통증을

남기고 있었지만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나는 질긴 목숨의 기인이었다.

그 순간... 자포자기했고 여전히 자포자기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는 일어서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모!...”

 

나를 부르며 달려온 사돈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내 몸의 반을

세우고 끌어안았다. 내가 그를 밀쳐냈지만 본드에 붙은 것처럼 그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왜 그랬어요...”

 

울먹이듯 사돈이 말했다. 얇은 흰색 추리닝을 뚫고 급하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가

내 귀로 울려 퍼졌다.

 

“우린 안된다구요... 제발 나 좀 나줘요. 삼촌...”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와 불안으로 떨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가 그를 증오했던

내 마음을 또 약하게 만들었다. 연민에 중독된 년처럼... 그가 또 불쌍하단,

같잖은 마음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득해야만 했다.

 

“왜 안 돼냐구요! 우리가 왜 안 돼냐구!”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삼촌은 나를 이모라고 부르고 나는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이런 관계를 어떻게 해결 할 건데요? 무슨 배짱이에요?

우리 부모님이 삼촌을 허락할 거 같아요?“

“두 분... 나한테 잘해주십니다.”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이었다. 대책 없는 그는 눈치도 없었다. 그 나이 먹도록...

내 부모님...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인심 좋은 분들이란 걸, 그들에게

끝없이 관대하단 것을... 사돈이 그 불쌍한 사람들 속에 한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를까... 따뜻한 몇 번의 배려로 사위자리까지 넘본 그의 착각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그것들을 잠시 걱정하며 멀리 마을로 짐작되는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봤다. 그런 나를 사돈이 안아들고 차를 향해서 걸었다.

 

차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던 내 강한 의지를 뒤늦게 깨달은 사돈이 차를 돌려

멀리 지나온 내 집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운전하던 그가 차갑게 식은

내 손을 기아 변속기와 번갈아가며 잡아주었다. 나는 독한 마음으로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을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놓았다.

 

‘우리 부모님은 삼촌이 그 나이 먹도록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돌며 살고 있는 것을

자주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술을 먹고 마을을 다니던 모습을 걱정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전라도 사람은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세요... 삼촌을 잘 해준 것은... 인간적으로 안쓰러워서였지,

딴 마음은 없으세요...‘

 

내 말에 사돈은 입이 붙은 것처럼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기아 변속기와

내 손을 번갈아 가며 잡고 마을까지 도착해서 환하게 불 밝힌 내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할 말 다하고 내리는 내게,

 

“이모를 사랑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여전히 경고처럼 말했다.

 

그 날 이후, 나 역시 변함없는 그를... 오기처럼 맞서듯 싫어하는 일만 보린 듯이

행동으로 옮기며 계속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런 내게... 신은 여전히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사돈의 편에 서서...

그의 편에서 나의 숨통을 조이고만 있었다.

 

부모님이 집으로 들어오시고 멀지 않아 나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처음엔 평소에 불규칙한 생리였기 때문에 그럴 거라며 불안해지는

내 마음을 위로했다. 세 숟가락을 뜨지 않던 짧은 입맛을 이유로

헛구역질에 대한 의문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기몸살에

걸린 듯 나른해지는 몸과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들이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점차 심각해지는 몸상태들이, 드라마의 한 장면들과 점점 흡사해지는

몸이 날이 갈수록 내 목을 불안으로 조여들게 했다. 그런 며칠이 지나고

멀리까지 가서 용기 내어 임신테스트기를 구입하게 했다. 그리고 사용하게

됐을 때 점차 뚜렷해지는 보라색이 두 줄로 가는 것을 보며 심장이 고무줄로

이어졌는지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에서 여전히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가슴 속 어느 바닥을 뒹구는 느낌을 받게 했다.

 

임신... 사돈과 한 번의 관계로 어이없게 축복받지 못할 불쌍한 영혼을 내 몸에

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통행금지에 걸려,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네 애비와 한번 몸을 섞었을 뿐인데

네가 생기고 말았다... 네 애비... 가진 것 없는 네 애비를 그래서 나는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여자 몸 잘못 굴리면, 엄마 짝 나는 거야...>

 

사랑하는 엄마를 닮고 싶었다. 책임감 강한 내 엄마를 담고 싶었지만...

뒤웅박 팔자는 아니 닮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경고해준 엄마에게... 나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착하게 고스란히 아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엄마의 그런 용기를 나는 닮지 못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부인과를 찾았다. 내겐 돈이 있었으니까.

백수지만 넘쳐나는 용돈을 받고 있었으니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천치같은 사촌언니처럼 떠들썩한 소문을 만들 수 없었다.

지혜(?)롭게, 교활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고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나는 멀리 떨어진 산부인과를 찾아 나선 날...남자 의사가

내게 말했다.

임신...2개월입니다, 하고...

낙태 수술을 받겠다니 의사가 또 말했다...

내가 너무 어린 것 같다며... 보호자를 데려오세요, 라고...

보호자를 데려오라니 예견치 못한 상황이었다. 돈만 가져가면 가볍게

끝날 줄 알았다.

드라마를 보면 그랬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어떻게든 나를 궁지로 몰고 싶었나보다.

여지없이 어느것 하나 만만치 않은 산을 만들어 됐던 것을 보면...

의사가 말한 보호자라면 부모님을 말함 인데... 엄마를 데려가? 아빠를 데려가?

말같지 않은 의사의 말에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또 홀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사돈을 만나서 그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애를 떼는 것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날... 더 비장한 얼굴이 되어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듣고

여지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린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아가야... 미안해... 난, 너를 원치 않아...’ 속으로 통곡하며 아기에게 작별만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