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욱의 집은 아담하고 정리가 잘 된 깔끔한 분위기였다.
2남 3녀 중 막내인 민욱만 미혼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언젠가 그를 통해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맏형은 공무원으로 면사무소에 계시고
누나 셋은 괜찮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고도 했었다.
집에 땅도 있고 빌라도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다며 자신만 결혼하면
어머니는 형 집으로 들어가실 거라는 묻지 않은 말까지 하던 날...
민욱은 나에게 또 호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들판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 앞에 나를 이끌고 가던 민욱은
밤새 많이 앓았는지 잔뜩 초췌해보였다.
“난 여기서 밖을 내다 볼 때가 좋더라. 계절마다 풍기는
느낌이 다르거든... 네가 우리 집에 와서 이곳을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 될 줄 몰랐네...“
파랑색 츄리닝 바지에 흰 반팔 티를 입고 있던 민욱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추수를 끝낸 빈 벌판이 넓게 트여있는
끝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보였다. 초록이 풍성한
봄과 여름, 곡식이 익어가는 황금빛 가을이 찾아 올 벌판은
민욱 말대로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나도 잠시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치와 별개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한 심정이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배고프잖아. 빨랑 떡 만두 국 끓여주고 갈 거야.”
나는 민욱의 안내로 거실과 분리된 주방 쪽으로 들어가서
냄비를 달라고 했고 파, 마늘, 조미료를 찾을 때마다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민욱은 내가 오기 전까지
누워있었는지 한쪽으로 눌린 머리에는 급하게 물을 묻혀
손질한 티가 났다. 그리고 몸에는 잔뜩 피곤이 묻어있었지만
내게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다시다로 육수 맛을 낸 곳에 떡과 만두를 넣고 끓을 때쯤
파를 썰었다. 뒤쪽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민욱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지만 주방 일에 서툰 나로서는 큰맘 먹고 해주는
음식이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으로 심열(?)을 기울이느라고
그가 뒤쪽으로 가까이 다가 올 때까지도 신경 쓰지 못했다.
썰은 파를 냄비 속에 넣으려는 순간에 민욱이 뒤에서
팔을 두르고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거북할 뿐... 어쩜 그렇게 떨림이 없는지
거북만 마음에서 뺀다면 그저 덤덤함만 남을 마음이 나로서도
야속할 뿐이었다. 민욱의 몸에 열이 있는지 뜨거운 체온이
내 등을 통해서 느껴졌다.
100m 달리기를 12초대로 달린 것 같은 급한 맥박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떡 만두 불면 맛이 없을 거야. 내가 워낙 음식엔 젠병인데
형 때문에 더 망치면 안되지. 빨랑 자리에 앉아...참, 김치는
형이 꺼내라. 나는 어떤 건 줄 모르겠으니까.“
나는 냄비에 파를 넣고 가만히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서...
“난 네가 끓여준 건 죽이 되도 맛있게 먹을 자신 있어...
잠시 이러고 있자... 난 네가 여기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아...
네가 음식 만드는 거 보고 있으니까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너무 행복해. 네가 또 화를 낼 수 있겠지만...
**야, 난 정말 너를 사랑해...
미칠 것처럼... 사랑해... 네가 나를 언제쯤 받아들여 줄까...“
나의 정수리께로 민욱의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사랑... 민욱의 몸이 닿을 때도 참아야겠다던 인내가
사랑이란 말에 흐트러지고 말았다. 키스를 받았을 때
느꼈던 불결함이 일어서 잔뜩 불편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나도 수없이 민욱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헌신 적인 그를
대할 때마다 양심이란 놈이 미안해서라도 이성으로 봐야한다고
알려주곤 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순순히 나를 따라주지 않았다.
“나랑 끝내고 싶어? 나한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우린 친구이상 아무 것도 될 수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해?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웠어?!“
내가 민욱의 팔을 신경질 적으로 풀어내고 뒤돌아서 그의
눈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민욱의 눈가에 물기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런 내 마음을 민욱이 알아
챘을까... 잔뜩 어깨가 쳐진 모습의 민욱이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와 식탁에 놓고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치아를 들어 내놓고
꺼벙이처럼 웃었다.
“나 배고파~ 빨리 줘봐. 엄청 기대 된다... 우리 **가
만든 음식의 맛이 어떨지...“
설거지까지 마치고 잠시 민욱의 방에서 그가 내민 앨범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까지 걸린 시간이 3시간을 넘지 않았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한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선영이네로 가려는데 민박 문 밖에 서있던 선영이 삼촌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선영이 이모! 잠시 나 좀 봅시다.”
“왜요?”
창밖에서 날 부르던 삼촌에게 따졌던 언니네서의 그 일이
있고부터 길에서 나를 만나면 사돈과 그 일행들이 내게 말을 붙이곤
했다. 음료수를 사서 건네거나 군것질을 좋아하는 내게 과자를 사서
건네기도 했다. 한 동네에서 사돈끼리 불편함을 없애려고 노력하나보다고
생각하며 나 역시 그 호의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형부의 음담패설에 내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그들도 재미있어했다.
때론 그들이 장난기를 담아서 내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처음보다 많이 편해진 사이가 됐지만 여전히 그들은 내게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간간히 말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나는 늘 그들에게
까칠하게 대했다.
“잠시... 내 친구가 이모에게 할 말이 있답니다.”
사돈이 민박 안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니까 친구 중에
한명이 밖으로 나왔다. 목포대 전산과를 졸업했다던
사돈의 친구였다. 바톤 터치라도 하듯 그가 나오자 사돈이
다시 민박 안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서있던 나와 민박 문밖에 서 있던 사돈 친구와의
거리는 15m쯤 떨어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시츄레이션이냐...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나를
부끄러운 듯 서있던 사돈 친구가 내게 손짓을 했다.
“이모... 잠시 저 좀 봐야...이리 좀 오실래요?”
민박 옆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선 그가 내게 말했다.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여기로 나와서 하세요.“
꼼짝 않고 서 있는 내 앞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걸어 나왔다.
“저...오늘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요?”
“선영이 이모를 좋아합니다... 밤마다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이모를 불러줬던 거였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선영이 이모를 후에 서울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요... “
“!!!”
남자 풍년도 아니고 이건 또 뭔 일인지...
잔뜩 삭은 아저씨가 나를 서울로 초대한 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이것보세요. 내가 그런 초대를 왜 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아무나 초대하면 쪼르륵 따라가는 우스운 여자로
보였어요?! 정말 기가 막혀서...“
내 말만 하고 그를 지나쳐서 콧바람 쌩쌩 거리며
언니네로 향했다. 이건 무슨 개 같은 경우야...
나도 연애는 하고 싶다고... 내가 꿈꾸는 연애관이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 사람들아...
당신들은 내 이상형과 너무나 멀단 말이야.
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궁상으로 도배를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