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오.
그래야 우리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향해 웃을 수 있지.
그리고 모든 일에는 다 주어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거요.
정점에서 뻗어나오는 빛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말이오."
"삶에도 정점이 있지. 정점은 가장 최고조에 이르는 지점이오.
모든 사람이 그러듯이 실수를 저지르지만 가장 어두울 때에도
마음의 빛을 결코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목표점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오. 정점은 우리 안에 감춰져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빛을 인식해야만 정점에 닿을 수 있소."
파울로 코엘료는 묘한 매력으로 날 사로잡는다.
몇 권의 책으로 그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의 글 속에서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아? 이 사람? 어떻게?? 아 ..이럴수가...하는 탄성이 잦아지면서 나는 주인공이 되기도하고
주변 인물로, 배경으로 수없이 변화한다.
코엘료의 다정하고 자상한 구성, 하루키의 무덤덤하고 간결한 문체.
그 둘의 절묘한 만남이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질때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이의 느끼는 감성이나 생각, 표현에서 나와 흡사함을 느끼는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아니, 흔하디 흔한 일 일수도 있다.
딸아이와 함께 같은 책들을 읽고, 그 아이가 읽으면서 경험하는 타인의 감성과 생각을
내게 되 물을때가 있다.
"엄마는 어떨것 같아?"하고 물을때 난 내생각을 최대한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아이가 작은 눈을 동그랗고 커다랗게 뜨고는 놀란 표정으로
" 엄마 이 책 읽었구나?"하기도 한다. 아이의 그 한마디는 작가가 의도한 것과 내가 대답한 것과,
아이가 이미 질문을 던졌을때 예상한 대답이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읽은 것도 있고 미처 내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들도 있다.
읽은적 없는 책속의 작가의 표현과 나의 생각이 일치할때의 그 묘한 감정은 뭘까.
아마도 내 논리와 사고의 방식이 보편타당하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것이리라.
그러나 난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한다.그것은 무엇인가.
논리앞에 감성은 한발치 뒤로 물러서게 마련이다.
감성이란것은 언제나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오만함'
그보다 더한 것은 나태함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기다리지 마라.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 있다면 원하는 만큼 정진하라.
바이블에도 같은 것이 있다. 욕심사납고 거만한 판사가 너무나 시끄럽고 귀찮게 구는 어떤 여인에게
원하는것을 허락해주는 대목이 있고,
두드리라 , 그러면 구하리라 하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흔하게 써먹는 대목도 그것이다.
간곡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것은 우는 아이 젖주기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락되지 않는 구함이란 무엇인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은 금단의 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꼭 필요한 것이 아닌것, 그것도 욕심을 부리면 안되는것에 대한 경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내게는 소용되지 않는 것들에대한
구함에 대해 매일매일 앉은뱅이 소경처럼 굴면서 떼를 쓴다.
무엇이 나아지겠는가. 무엇을 얻을수 있겠는가.
비겁한 내가 버릴것은 바보 이반에게만 허락된 것을 구하는 탐심일것이다.
궂이 난해한 것이 아니다. 간단한 것이다.
세상을 향해 주먹을 펴보이기.
그리고
.
.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음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
.
.
허락하시길..
그리하여 삶이 내게 무작위로 떠안긴 무거운 덩어리들은 침묵속에 사그라들길..
아무런 감정의 동요없이.
그런 후엔 내게 허락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듯하다.
이미 알고 있는것들에 대한 부정을 그치게 되리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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