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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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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의 해후(1)


BY 김미애 2013-05-05

남양주에 사는 친구와 통화했을 때 모임에서 모악산 귀신사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여고 졸업 후, 각지로 흩어진 친구들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 얼굴을 보자는 데에 뜻을 같이 한 모임이다. 지금은 다들 결혼하여 수도권에 살고 있고, 지방에 있어 자주 올라갈 수 없는 나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이 개인사정으로 모임에서 빠지고 새 친구로 채워졌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모임을 30여 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걸 보면 참 무던한 친구들이다. 

다들 어떻게 변했을지, 그 친구들을 못 본 지 몇 년 되어 그간의 공백이 무척 궁금하였는데 날짜가 잡히면 전화를 하겠다며 전주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그 후 별말이 없었다.

언제 내려오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친구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내가 끼는 것이 불편할지 모르는 일이라 선뜻 물어보기가 망설여졌던 참에 마지막 주 일요일 아침, 정숙이가 전화를 했다. 

"우리, 지금 내려가고 있어. 12시 경에는 도착할 것 같으니 이따 전주에서 보자."

 

가든 못 가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전화였고, 광주에서 전주까지 시외버스로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고는 해도 바로 올라오라는 전화는 너무 뜬금없고 당황스러웠다. 

최소한 하루 전에는 얘기를 해줘야 남편한테 허락을 받고 채비를 할 텐데, 지금 올라오라고 하면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점방의 바뀐 전화번호를 지금에야 찾았다고 하는데 뭐라 할 것인가.

 

오전에는 밤늦게까지 일한 남편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고, 점방의 빠진 물건을 채우려면 갑자기 시간을 내기가 수월하지 않다. 그래도 친구들이 전주까지 내려온다는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한자리에서 보겠나, 일단 남편한테 말이라도 꺼내보기로 했다.

"나, 콧바람 쐬러 갔다 와도 돼?"

남편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무실 문을 빠끔 열고 없는 애교를 떨듯 물었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내 인기척 소리에 누운 채로 고개를 든 남편이 "어디?"라고 묻더니 "전주!"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거기까지 뭐하러 가?"라고 딱 한마디 덧붙이고 도로 누워버렸다. 나도 두말 않고 문을 닫았다.

 

"자네나 나나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살면 쓰겠는가?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어디든 가고 싶으면 갔다 오소."

불과 며칠 전에 남편이 나를 감동시켰던 그 말이 빈말이었던 것인가.

물론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남편 혼자 점방을 종일 봐야 하므로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고, 오가는 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도 안다. 

남편이 다녀오라고 했어도 변변한 차림이 아니라 선뜻 길을 나서기도 그렇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몇 년 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인데 그냥 기분 좋게 다녀오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5년 가까이 점방과 집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살면서 외출다운 외출은 손으로 꼽는다. 오죽하면 점방에서 100미터만 벗어나면 길을 잃어버린다는 우스갯말을 입에 달고 살았겠는가. 그런 내게 첫마디가 꼭 그렇게 뭐하러 거기까지 가느냐고 해야 했을까? 

 

모처럼 친구들이 내려온다는데 점방 때문에 갈 수 없다 생각하니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에유, 가시나들. 이왕 마음먹고 내려온 김에 광주까지 내려와서 울 남편한테 눈도장 좀 찍고 내 위신 좀 세워주고 가면 어디가 덧나남?

 

 "우리, 한번 보자."

친구들과 통화를 할 때면 단골 메뉴처럼 거론되는 말이다. 그러다 막상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나 만나자고 하면 오며 가며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길어 "나, 못 가."로 꼬리를 내리곤 했다.

 

서울에 사는 신혜가 친정엄마가 편찮으셔서 내려간다며 나더러 강진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도 "그러자."라고 했으면서 약속을 못 지켰다. 

점방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서 경황이 없는 와중이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서운하였을 신혜한테 무척 미안하여 무거운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에 내려온다는 친구들 중에 필시 신혜도 있을 텐데 지난번에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고 싶었지만 바로 올라오라고 하면 어떻게 가느냐는 것은 구구한 변명일 뿐이고, 결국 또 "나, 못 가."이다.

 

기분이 상한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이 내게 "뭐하러 거기까지 가?"라고 물었던 것은 오며 가며 시간을 많이 뺏기니, 친구들이 이왕 내려오는 거 여기까지 내려오라고 해서 차분히 만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침에 집에서 같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을 안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지금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였겠는가. 

내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만큼 망설임이 컸기 때문이지만, 내내 아무 내색도 안 하고 있다가 꼭 당일에 닥쳐서야 "나 ~해야 하는데."라고 했던 게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후에 '~하겠으니 그리 알라'는 통보나 다름없는데 자기 동의가 무슨 필요 있느냐는 것이다. 

 

남편이 "거기까지 뭐하러 가?"라고 했을 때 이러이러하니 갔다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어야 하는데 우리 가족은 대체적으로 한번 말을 꺼낸 것에 상대방이 '왜'라는 말을 꺼내면 바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때론, '왜'라는 문구를 앞세우는 것은 반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허락을 해도 되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납득할 만한 얘기를 더 들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왜~해야?", "뭐하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은 그만큼 '~하면 안 된다'에 억압되어, 말해봤자 어차피 허락을 해주지 않을 거라 미리 단정을 지어버리고, '해주기 싫으면 말고'의 뉘앙스가 강하다.

 

"거기까지 뭐하러 가?"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변변한 외출 한번 못 한 내가 마음에 걸려 편히 쉬지 못하고 뒤척였을 남편이 결국 다녀오라고 했다. 지금까지 입이 댓자나 나와 혼자 구시렁거렸던 게 미안했다. 나는 남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점방에서 입고 있는 차림 그대로 내달렸다.

 

신발은 겉이 삭아 너덜거리고, 질끈 묶은 머리에다, 친정엄마가 작아서 물려준 옷을 걸친 거 하며 완전히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게다가 초등학생들도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기도 없이 달랑 친구 휴대전화번호 몇 개 적은 쪽지와 약간의 비상금이 전부였다.

 

광천터미널에 도착하여 전주행 표를 끊기 전에 공중전화부스에서 영숙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올라가려고 터미널에서 차 기다리고 있는데 느그는 지금 어디쯤 왔냐?"라고, 친구들이 얼마나 반길까를 상상하며 의기양양한 어투로 약간 목소리를 깔았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어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우리, 지금 전주에 와 있어. 근데 니 올라와도 우리 못 만나. 친구 중에 바쁜 애가 있어서 곧 올라가야 해."라며 영숙이가 나보다 한술 더 떠서 목소리를 깔았다.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체념을 하고 있다가 남편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한걸음에 터미널까지 왔는데, '얼른 올라와라!'가 아니라 '올라와도 못 만나야.'라니, 터미널에 오기까지 나는 친구들 만날 생각만으로 설렜는데 그 친구들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일 뿐이었을까, 하여 서운하기까지 했는데 영숙이 가시나가 날 놀리려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 올라와. 니가 온다고 하면 시간을 만들어 볼게. 전주에 도착하면 전화해."라는 생색에 가까운 덧붙임이 조금만 늦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그 친구들을 못 만나게 되었어도 헛걸음하고 돌아가 남편 보기가 민망해서라도 어쩌면 전주행 버스를 탔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할애된 외출의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