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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을 추억하다(2)-선생님과 말자 언니


BY 김미애 2008-12-31

 선생님과 말자 언니 /김미애


눈이 왕방물만 하고 목소리가 사근사근하였던 말자 언니는 유난히 새우깡을 좋아했다. 난 짠맛이 강하고 특유의 약간 비릿한 향이 느껴지는 새우깡보다는 달짝지근한 죠리퐁을 더 좋아했는데 말자 언니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새우깡 맛에도 길들여졌다.

지금도 여전히 죠리퐁을 즐겨 먹지만 이따금 새우깡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말자 언니와 이불 속에 배를 깔고 엎드려 새우깡을 먹을 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기억이 정겹게 다가온다.

말자 언니와 자취를 한 지 얼마 안 있어 언니가 내게 지나가는 말처럼 황보 선생님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황보 선생님은 나의 고 1때 담임이며,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말자 언니 또한 그 선생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함께 얘기를 나눌  ‘꺼리’가 생긴 셈이다.

내가 앉았던 자리는 맨 앞줄 선생님의 바로 코밑이라 튀는 침의 파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황보 선생님은 왜소한 체구에 마치 빌려 입은 듯한 헐렁한 양복을 입고 다녔다. 바짓단은 항상 질질 끄는듯하여 칠칠하다는 느낌이 남아 있고, 돋보기에 가까운 뿔테안경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력도 무척 안 좋아 보였는데 언젠가 침침한 눈을 비비느라 안경을 벗은 적이 있다. 생기다 만 것 같은 무척 아담한 눈이었다.

머리 스타일은 2대8의 비율 중 8에 해당하는 덥수룩한 머리가 한쪽 눈을 덮고 있었다.


열강을 하실 때의 버릇은 뜨나마나한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이 가린 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니 자연히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얼굴이 턱을 앞으로 내민 형상이었다.

선생님이 입술을 오므리실 때마다 난 왜 아이러니하게 똥꼬를 연상했을까, 한번 똥꼬 같다는 생각이 들자 선생님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그 똥꼬가 번데기처럼 주름을 잡으며 오므렸다 벌렸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영 신경이 쓰이고 민망하여 선생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또 있다. 선생님은 영어가 전공이었지만 불어에도 능통하셨다. 이다음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가 프랑스라는 얘기 끝에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칠판에다 불어로 판서하고, 똥꼬 아니 입술을 한껏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시를 낭송하셨는데 거의 처음 접하는 불어의 발음과 한껏 몰입된 선생님의 표정이 교실을 온통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아무튼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이하 생략)’란 시가 연상된다.

언니네 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 반 급우들 사이에서도 잘 생기고 멋있어 보이는 총각 선생님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몇몇 총각 선생님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좋다’, ‘싫다’ 의견이 분분했다. 때론 칠판에다 공개적으로 인기투표를 하기도 했다.

말자 언니가 내게 어떤 분이셨냐고 물어봤던 황보 선생님은 악조건을 고루 갖춘 외모였음에도 그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영어수업 시간이 든 날은 거울을 한 번 더 보거나, 다른 과목에 비해 유달리 영어공부에 신경을 쓰는 애들도 꽤 있었다.

아마 부담없는 외모에다 성격도 소탈하고 우스갯말도 잘 해서 친근감이 생겼던 듯하다.

또한, 웃으면 눈이 감기며 조그만 입이 벌어지면서 잇몸이 드러나 보이는 어느 개그맨을 닮은 이미지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언니는 고 3때 진로 문제로 그 선생님께 몇 차례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불문과에 가게 된 게 아무래도 그 선생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았다.

대학 진학 후에도 선생님과 이따금 만나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불어와 대학생활에 관해 조언을 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언니가 나와 함께 살 때, 선생님의 대학원 논문을 타이핑해주고 불어를 배운다며 밤늦게 올 때가 많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 프랑스로 함께 유학을 가자는 프러포즈를 받았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난, 언니가 농담하는 줄 알 정도로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논문을 타이핑해주느라 만남의 횟수가 늘면서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게 되고 자연스레 열애로 발전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맏딸인 말자 언니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부모님으로선 스물한 살짜리 딸을 시집보낼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언니가 학교를 졸업하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었으며, 졸업을 한 후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면 집안도 좋고 경제력도 있는 듬직한 사윗감들이 줄을 설 텐데, 느닷없이 웬 늙다리 같은 총각이 불쑥 쳐들어와서 금지옥엽 기른 딸을 달라고 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심정이셨던 듯 결사반대를 하셨다.

언니보다 여덟 살이 많은 스물아홉의 나이는 그 당시만 해도 완전히 노총각 대열에 들었을 때였다. 게다가 사윗감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남들 앞에 ‘우리 사위입네!’하고 내보일만한 인물이라도 되면 그나마 덜 서운할 텐데 전혀 눈에 안 든 데다 건강도 좋지 않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니 딸 장래를 걱정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셨으리라.

결국 말자 언니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왔다며 혹시 선생님이 찾아오시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마라고 했다.


그날 저녁 무렵, 밖에서 언뜻 보면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방문 바깥쪽을 자물쇠로 잠그고 부엌을 통해 들어와 안쪽에서도 문을 잠갔다. 그리고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언니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는데 언니의 예상대로 선생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언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숨을 죽이고 대꾸를 하지 않으니 체념한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래도 혹시 안 가고 있을지도 몰라 여전히 전등도 못 켠 채 컴컴한 어둠 속에서 언니랑 눈만 껌벅이고 있다가 이제는 갔겠지, 안심하고 불을 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방문을 세게 두드리며 말자 언니를 부르는 절박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 시간은 족히 되었을 법한데 그때까지 가지 않고 벽에 기댄 채로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게 되자 말자 언니가 문을 열어줬다.

방문 앞에 가랑비를 맞은 꾀죄죄한 몰골로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로서는 거의 2년 만에 뵌 것인데 여전히 2:8 가르마는 그대로였으며, 8에 해당하는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것도 예전과 다름없었다.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선생님이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선생님이 반가웠는데 선생님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눈에 뵈는 게 없을 상황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긴 하지만 학창시절에도 있는 듯 없는 듯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으니 어쩌면 자기 반의 학생으로 존재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선생님과 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선생님이 아무리 뭐라 해도 말자 언니가 그대로 있어달라고 하면 언니를 대신하여 방패막이가 되어줄 참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괜찮을 거라 하기에 멀리 가지 않고 자취방과 딴채의 중간지점에 서 있자 채 5분도 되지 않아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비명에 가까운 언니의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말자 언니가 피범벅이 된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말자 언니의 절교 선언에 잘 마시지도 못한 술을 마시고 온 선생님이 홧김에 부엌칼로 자신의 손에 자해를 한 것이다.

선생님은 손을 다친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자 언니가 마음을 되돌리지 않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며 초연하였고, 말자 언니는 여전히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언니더러 택시를 불러오라고 등을 떠밀어 내보낸 후 상처 부위를 수건으로 감싼 채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언니를 뒤따라 나갔다.

……많이 놀랐지?”

“네.” 

“미안하다……니 볼 낯이 없다. 하지만 나도 선생님이기 이전에 한 남자일 뿐이야. 그런데……하도 괴로워서 술 한잔 먹은 김에 이런 못난 꼴을 보여서 부끄럽다만 니가 이해해 다오.”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못 밟을 정도로 어려운 분이셨는데 왜 좀 더 이성적이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오죽 절박한 마음이었으면 그랬을까,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스물아홉 살이나 먹은 선생님이 제자 앞에서 벌인 너무나 철부지 같은 행동에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또한 사랑 앞에 너무나 나약한 모습을 봐버린 터라 ‘선생님’의 권위가 느껴지기는커녕 그저 철이 덜 든 남자로만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자 언니가 방을 같이 쓸 사람을 구하려 했던 것은 혼자 살고 있는 자취방에 선생님이 불쑥 찾아오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말자 언니네 부모님이 왜 반대를 하였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날 밤늦게 언니가 아픈 선생님을 혼자 보낼 수 없었다며 손에 붕대를 감은 선생님과 함께 돌아왔다. 열 바늘 넘게 꿰매긴 했지만 다행히 신경은 손상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상처 부위가 아프다며 엄살을 부렸는데 언니는 선생님이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마음 아파하면서 엄살을 다 받아주었다. 애써 모른 체하려 했지만 완전히 닭살스런 한 쌍이었다.

두 사람과 더불어 허심탄회하게 나눴던 세세한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앞머리가 그렇게 눈을 덮고 있으면 갑갑하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눈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젖히고 이마를 보여주었다. 눈썹 바로 위의 이마에 볼록 튀어나온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혹이 있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2:8의 머리를 고수하며 한쪽 눈을 덮고 있는지도 그때서야 이유를 알게 된 것인데, 혹을 그대로 두면 점점 커지므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감추려 했던 비밀을 알고 나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언니는 남들이 선생님의 외모에 대해 뭐라 하든, 병치레가 잦아 약을 달고 사는 분이고, 나이 차도 많아 부모님이 머리를 싸매고 누워 반대를 하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선생님과 함께 가야 할 것 같다며 며칠 후에 아예 방을 뺀 후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소식에 말자 언니의 엄마가 충격으로 쓰러지셨지만 선생님을 향한 언니의 마음이 확고하여 부모님도 결국 선생님을 사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셨는지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평범한 교제가 아닌, ‘스승과 제자의 열애’였던 만큼 모교의 선생님들은 물론 졸업생들에게도 나 못지않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며, 친구들 모임이나 동창모임에서도 오랫동안 가십거리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급속도로 맺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그날 밤의 자해소동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여전히 새우깡을 보면 언니와 자취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테고 그날 밤의 소동 역시 주마등처럼 스칠 것이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언니가 선택한 길이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이었기를 바라며 어느 하늘 아래 살든 단란한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