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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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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BY 써머스비 2008-09-17

                        

                        그해 여름


  안개가 자욱하다. 아니 차부의 먼지인지도 모른다. 나는 덩그러니 공터에 혼자 서 있다. 키가 큰 옥수숫대는 수염을 늘어뜨린 열매를 안고 있다.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초록 대문이 얼핏 보인다. 꿈속에서도 지금 깨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도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잠에서 깼으니 이번에는 더 기다려야 한다. 그 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안개 속에 나를 세워두고 있었다. 드라마 재방송 보듯이 재연된 꿈이 신기롭기만 했다.

 꿈속에서 기다리던 친구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오지의 청성지서로 발령이 났다. 동생은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엄마는 옥천과 청성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녔지만, 이제는 학생만 해도 대전으로 통학하는 막내삼촌까지 네 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옥천에는 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대 가족이 있었다.


 봄이 이울던 어느 날,  엄마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밥이라도 챙겨주라며 나를 전학시켰다. 버스는 터덜거리며 말티고개를 넘어갔다. 차멀미를 심하고 했고 버스 안에서 두어 번 토하기도 했다. 국도를 벗어난 버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초록 들판사이로 하얀 자갈이 깔린 금강줄기 보청천이 보였다. 청성면 신계리 들녘을 바라보는 지서가 무궁화로 담장을 두르고 서 있었다. 버스는 지서를 지나 마을 지붕위로 흙먼지를 날리며 골목을 힐끔 거리다 광장에서 멈췄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공터였다. 동네가운데 자리한 공터만 아니라면 우리 외갓집 동네와 비슷했다. 이차선 도로를 따라 집들이 길게 이어져있는 우리 동네와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는 관사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지서장 관사는 하얀 페인트칠을 한 나무담장을 두르고 있어 예뻤다. 우리 집은 유리문이 달린 넓은 마루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았다. 학교는 동네 마당 같은 차부를 가로질러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교문에서 내려다보면 들판 끝으로 강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전학 간 첫날, 엄마는 특별히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혀 나를 교단에 세웠다. 물론 인사 한마디 못하고 몸을 비비꼬다가 얼굴만 빨개져서 내려 왔을 것이다. 전학 온 아이라고 아이들이 유리창너머로 기웃거렸고 곧 가까워졌다. 그런 아이들의 시선이 무심해졌을 때 그 친구는 나와 똑 같은 원피스를 구해 입고 학교에 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쌍둥이라는 별명으로 묶였고 놀림도 받았다. 학교가 끝나면 공터에 모여 고무줄놀이와 술래잡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루 종일 흙속에서 뛰어다니느라 밥이나 제대로 끓여먹었는지 까마득하다. 보릿고개를 겨우 지난 시절 학교에서 급식 빵을 나누어 주었다. 학생 수가 많은 읍내 학교에서는 분단별로 받았는데 일주일에 한번 정도 차례가 왔다. 배급받는 양에 따라 하나도 모자라 반쪽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오니 한 번에 다섯 개씩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동생은 반장이라고 똑 같이 나눠주고 나머지를 다 가져오곤 했다. 그런 날이면 빵을 쪄서 지서에 내다주곤 했다. 그냥 먹을 때는 현미밥 같았지만 쪄서 먹으면 햅쌀로 지은 밥처럼 쫄깃쫄깃하고 부드러운 옥수수 빵이었다.


 그해 여름, 마을은 온통 녹색이었다. 이른 아침 오월의 숲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고 아버지는 본서(경찰서)로 발령이 났다. 나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짙어가는 여름과 함께 친구들과 정이 깊어지고 있었다. 들풀같이 거침없는 여름을 보내고 하늘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떠났던 학교의 같은 반으로 다시 전학을 왔다. 쉬는 시간이면 호기심 많은 친구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한동안 청성의 친구들과 우리 반 친구들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만나고 싶어도 교통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어른들이 데려다 주지 않으면 우리들은 붙박이 가구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직장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그해 여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두 번째 꿈에서 깨어나니 새삼 그립다. 그 시절 마을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그림자같이 함께 뛰어다니던 친구들과, 텃밭과 담장에서 집안을 지키던 옥수수나무, 햇살 따갑던 강가, 허기를 달래주던 급식 빵. 이상하게 꿈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심산한 오늘을 달래주려는 또 다른 내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활이 힘들어도 좌절하지 말고 그 푸르던 꿈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였으리라. 아름답던 여름이 되살아나 오랫동안 버석거리기만 하던 가슴이 촉촉해졌다.

 

 그래, 올 여름을 위한 이벤트로 베란다에 옥수수를 심어야겠다. 옥수수 담장이 가슴의 선글라스가 되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