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위태하게 품고 있던 유리잔은 마침내 깨어졌다. 남편은 이제 더욱 늦은 시간에 더욱 당당하게 귀가를 할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왜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이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더욱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는 도대체 왜 나와 결혼을 했고 도대체 왜 나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일까. 어차피 전업주부인 내가 그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저 식사를 챙겨주고 옷가지를 챙겨주는 것뿐인데 그거야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 그녀와 가정을 꾸리면 해결 될 것이 아니던가.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를 만난 지 한 달여가 지났던 그 때처럼 내가 먼저 이별을 통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꿈은 점점 더 정열적으로 변해 갔다. 여전히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리도 꿈의 내용이 드라마틱한지 나는 꿈속의 그 상대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오직 그 꿈만이 나의 단 하나의 위로였고 안식처였다.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나는 설레고 들뜨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게 마음을 주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나를 애틋하게 품어줄 꿈속의 그 남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처음 가졌던 죄책감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남편이 어쩌다 일찍 퇴근한 날, 나는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우리 여기서 그만 끝내요."
"......."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너무 쉬워서 그동안 왜 이혼을 못했나 싶었을 정도였다. 남편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보며 나는 내가 마치 종이 한 장 만큼의 값어치도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헌 신짝처럼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멸감에 나는 방으로 들어와 이혼 서류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심장을 찢고 내 마음을 찢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찢고 사라져버리고 싶은 현실을 나는 그렇게 조각조각 찢고 있었다.
현실은 언제나 내게 고통이었다. 그 고통에서 도망치려 나는 마취가스를 흡입하듯 자꾸만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몸은 가뿐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나른하고 피로감이 쌓여 더 많은 잠을 자고 싶어질 뿐이었다. 꿈을 꾼 날이면 눈을 뜨기가 싫었다. 정신은 잠에서 깨었어도 눈을 뜨고 일어나 분주히 움직일 여력과 의지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마치 나사가 서너 개쯤은 너끈히 풀린 듯한 몰골로 나는 밖에도 나가지 않은 채 하루 종일을 집안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단지 그 질문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그와 나,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새로이 이혼 서류를 작성해서 이제는 내가 알아서 남편의 도장을 찍었다. 사랑하기는 어려운데 헤어지기는 참 쉬웠다. 그저 종이 조각 하나와 도장 하나에 부부로 살던 두 사람이 남남이 되었다. 헤어짐을 오랫동안 준비했기 때문일까. 남편과 이혼을 한다고 해도 나는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에 그렇게나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었는데, 함께 하기를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그 다음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가는 것이다. 남편의 체취가 섞인 내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을 챙긴 채 위자료로 마련한 작은 전세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옮겼을 때 나는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고서 펑펑 눈물을 쏟았었다.
남편과 헤어진 첫 날은 그렇게 긴긴 밤의 절반 가량을 울면서 보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지쳐서 잠이 들었고 난 꿈을 꾸었다. 여전히 얼굴을 알 수 없는 따스한 그 남자, 그 날 밤 꿈속의 그는 울다 잠든 내 곁에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시린 내 마음이 따스함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 사랑없이 둘이 사는 것 보다 혼자 살며 사랑을 찾자.'
꿈 속에서 나는 그리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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