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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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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립스틱


BY 둘리나라 2007-09-13

 

                                  제목: 엄마의 립스틱


 오랜만에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아침부터 소란을 떨었다. 매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손에는 김치 국물 냄새에 아줌마 소리가 익숙해진 나를 잊고 여고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 때문이었을까.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고 바빠졌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화장대에 앉았다. 거울 속에는 눈가에 주름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한 서른이 넘은 낯선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세월은 뽀얗던 피부에 상큼하고 생기발랄한 소녀를 대체 어디로 데려가 버리고 뚱뚱하고 매력 없는 사람을 데려다 놓았는지 ……. 얕은 한숨이 목을 타고 오르며 시간의 야속함을 원망했다.

 “엄마, 빨리 화장하세요. 그래야 예쁘지요.”

 딸아이의 눈 속에는 나도 해주세요라는 말이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매달려 있었다. 미소를 지어주고는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아이섀도를 바르고, 마스카라를 하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꺼냈다.

 “엄마, 나도 발라주세요.”

 아이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내 앞에 다가섰다. 어릴 때 내가 했던 그대로 말이다. ‘그래 내게도 너 같은 추억이 있단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추억의 배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갈라 터져 나뭇등걸 같은 엄마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립스틱위에 닻을 내렸다.

 무능력한 가장! 아버지의 이름표 위에 적힌 글씨였다. 젊은 시절 군인 이셨던 아버지는 마을의 자랑이었고 다른 동네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똑똑하고 예의 바르며 빠른 진급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당신의 제복 입은 멋진 모습은 지금도 사진 속에서 시간이 멈춰진 채 청춘을 살고 있다. 그랬던 아버지가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친구 분과 건축 일에 뛰어들었을 때 삶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운명은 소리 없이 아버지의 등에 방아쇠를 당기고야 만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철판이 안전모를 쓰고 있던 아버지의 머리에 떨어졌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필사적인 몸부림을 하게 만들었다. 살려야 한다는 엄마의 간절함이 그 많았던 재산과 목숨을 교환했고, 혼자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게 되어 돌아온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6남매가 끼니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 고기잡이가 유일한 생활의 전부였던 거기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생 사람들을 지휘하고 통솔했던 당신에게 세상은 텅 빈 마음과 쓸쓸한 뒷모습을 선물로 주었다.

 그날부터였다. 아름답고 포근한 엄마에서 억척스럽고 악바리인 영덕 댁으로 변한 것이. 새벽이면 비린내와 함께 끙끙 앓는 몸을 데리고 생선 배를 따러 물안개 속을 걸어가던 무거운 어깨가 아픔으로 코끝에 다가온다. 바닷바람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생선의 배를 가르느라 갈라 질대로 갈라져 까칠한 철 수세미 같은 손이 유년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평생 화장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엄마가 여자라는 사실을 천천히 잊어가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이구, 지지리도 복도 없는 년. 서방 복 없는 년이 자식 복도 없다더니. 아이고, 내 팔자야!”

 넋두리처럼 입에 달고 살아온 말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가득했기에 이미 두 분은 사랑이 없을 것 이라는 판단을 너무 쉽게 내려 버렸다. 나의 경솔함을 탓하는 일이 생기기전까지.

 동네에서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화장하는 엄마를 처음 본 그 날은 어린 나에게는 놀라움이었다. 까만 얼굴에 파운데이션은 밀리다 못해 번들거렸고, 눈두덩에 칠해진 아이섀도는 한대 맞아 멍든 것처럼 시퍼렇고 어색했다. 손바닥만 한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매만지더니 장롱 깊숙한 곳에서 립스틱을 보물 꺼내듯 손에 쥐셨다.

 “엄마, 나도 발라 주라, 엉.”

 난 엄마의 손에서 립스틱을 빼앗아 얼른 발랐는데, 그만 툭 부러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순간 뺨에 불이 번쩍 나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노무 가스나야. 이기 어떤 긴데 니 아부지가 사준 긴데 우짜믄 좋노. 이일을 우야노!”

 아파서 엉엉 우는 내 손에서 립스틱을 빼앗아 간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준 것이라고. 엄마와 아버지는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려서 몰랐지만 결혼을 하고 내가 자식을 낳아 보니 이제야 조금 알겠다. 부부라는 게 참 신비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밉다 하면서도 살아지고, 좋다 하면서도 헤어질 수 있다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아버지와 엄마의 은근한 구들장 같은 사랑은 미운정이 깊어 사랑의 온기가 된 따스함이라 말하고 싶다.

 부러진 립스틱을 소중히 간직하던 모습 속에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은 별로 꾸미지 않았지만, 여자는 피부가 고와야 한다며 쌀 씻고 남은 뜨물이며, 시금치 삼고 거른 물이며, 오이 썬 것들을 챙겨주시던 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세월 속에서 이마에 앉아 버린 야속한 주름이, 머리에 주인 행세를 하는 흰 머리카락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초점이 안타까워 가슴 한쪽이 자꾸만 답답해온다.

 요즘은 화장품도 고급화되어 돈만 있으면 좋은 제품을 원 없이 살 수 있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것이 다 필요 없으리라. 부끄러워 살짝 숨겨와 말없이 건네주던 아버지의 립스틱보다 좋은 화장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건 화장품이 아니라 사랑이고, 믿음이고,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요, 희망이었을 것이다.

 “엄마, 화장하다 말고 뭐해요?”

 아이가 흔들어 나를 추억의 최면에서 깨웠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거울 속에 나를 쳐다보니 이상하게 발끝에서 아픔이 타고 올라와 자꾸만 눈을 흐리게 한다. 립스틱을 아직 못 발랐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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