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녀의 희망
온몸을 녹여 버릴 듯 뜨거운 열기를 토해 내는 아스팔트를 걷는데도 발에는 어떤 느낌도 나지를 않는다. 몸속의 세포들이 일순간에 전부 죽어버린 듯 감각을 느낄 수가 없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커피숍의 문을 열면서도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구석진 자리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굳어 버린 남편! 그리고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듯 새까만 얼굴에 불안한 듯 떨고 있는 한 여자. 순간, 머릿속으로 휑하니 바람이 지나간다. 숨 막히는 더위도 이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서늘함으로 바뀐다. 애써 도리질하며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현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금 내 앞에 있다.
“안녕 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불안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남편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게 불안한지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말을 꺼냈다.
“얘가 바로 그 애야. 갈 곳도 없는 아이야.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불쌍한 애야……. 당신이…… 이해해 줘!”
곁눈질로 쳐다보는 얼굴에 욕이라도 미친 것처럼 해 주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이 얼굴로 올라왔다. 무슨 이해? 당신이 바람피운 거? 아님, 얘를 내게 데려온 거? 도대체 뭘? 수십 가지의 질문들이 앙칼진 독을 품고 입에서 솟아져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커피숍의 창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들이 온몸을 파고들며 세포 하나하나마다 용서하지 말라고,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따갑게 침을 놓는다. 입속에서 맴도는 많은 말들을 삼키며 그녀를 보았다.
“몇 살이니?”
“스물일곱!”
커다란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텔레비전의 연속극처럼 울고불며하며 머리채를 쥐어뜯을까. 아니면 간통죄로 고소를 할까. 눈이 시퍼렇게 되도록 때려줄까.
“가자! 집에 가자.”
수많은 생각과는 반대로 내 입에서는 집에 가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서른 살의 여름. 2000년의 뜨거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작은 가방 하나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그녀는 남편과 나와 아이들의 보금자리에 불청객이 되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남편을 사랑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그저 스쳐 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주기를 바랐다. 사람의 정이란 것은 인력으로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어린 나이에 알았기에, 보았기에…….
내 나이 열 살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오빠의 바람은 새언니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고, 그 여자와 결국은 헤어졌지만 가슴속에 남은 사랑은 지울 수가 없었는지 껍데기로 살아가는 오빠를 보았기에, 가슴에만 남아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친 날개를 쉬어가는 한 마리 새이길.
그녀가 우리와 생활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친구에게서 울음 섞인 전화가 왔다.
“야. 너 미쳤니? 당장 둘이 간통죄로 고소하고 너 새로운 인생 찾아. 어떻게 너한테 그럴 수 있니? 반대하는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랑만 믿고 모든 걸 버린 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친구는 나보다 더 흥분해 울먹이고 있었다.
6남매의 막내딸. 그것도 엄마의 나이 마흔에 얻은 딸이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고이고이 키웠더니, 머리 컸다고 남자 하나 데려와 인사를 시켰을 때 부모님의 놀란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백짓장처럼 변해버린 엄마. 가난하고, 배움도 부족하고, 시어머니도 안 계신 집안에 보낼 수 없다 하시며 피를 토했다. 그 반대의 벽을 남편의 사랑만 믿고 두 분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도망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한 나였다. 그 결과로 부모님과 형제를 잃어야만 하는 대가를 얻었다.
“괜찮아. 나, 이겨낼 수 있어. 부모님께 지었던 죄를 이제 받는 건 가봐.”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친구에게 했다.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가슴 한 곳에 구멍이 나버린 듯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추수를 마친 들판을 지나는 바람 소리.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과 그녀는 마주 보며 잠들어 있다. 셋이서 먹는 어색한 밥상은 돌을 씹는 듯 거북하다. 함께 있어도 얼굴 보며 할 말이 없다. 그저 흐르는 침묵 속에 뜨거운 선풍기만이 야속하다. 이 지겨운 기다림의 끝은 어디인가. 이기고 지는 스포츠 경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난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짓을 바보처럼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더위를 뚫고 비가 내렸다. 목말라 있던 대지가 빗방울에 젖고 있다. 창을 타고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본다.
“언니, 커피 한 잔 하세요.”
그녀는 쟁반을 내밀며 맑은 눈으로 이야기했다. 은은한 향이 방안 가득 퍼지며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말없이 그냥 커피 잔만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언니는 내가 안 미워요? 왜 화를 내지 않아요? 차라리 욕을 하고 때리기라도 했다면 저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답답하다. 정말 답답해 속이 터져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새처럼 그녀는 떨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렸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서로에게 이로운 잣대로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는 게 전부일 뿐. 난 처음으로 그녀를 같은 여자로서 안을 수 있었다.
“나도 여자고 사람이야. 왜 네가 밉지 않겠니. 하지만 너 역시도 불행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내가 감싸 안아야 할 한 부분이 아닐까라는……. 우리 전생에 한 몸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다 이생에 너와 나로 갈라져 태어났다 생각하자. 한 남자를 그리워하다 죽어 다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서 만났다고 생각하자. 많은 세상을 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인연도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운명이 아닐까?”
아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엄마 젖을 빨면서부터 생기는 건 욕심이다. 한쪽 젖을 빨면서 손으로는 다른 쪽 젖을 찾는 행동에서 욕심은 시작된다. 인간의 욕심은 본능적으로 잠재되어진 것이다.
우습게도 난 그걸 깨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내 것이라는 욕심, 그의 마음과 몸은 나 외에는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어리석은 욕심 속에서 벗어나 올바른 눈으로 삶을 보고 싶었다. 아니, 그러길 소망했다. 한 사람의 가치 있는 인간으로.
지루한 장마가 끝나갈 무렵의 아침에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책상 위에 놓인 쪽지 한 장이 전부인 채.
‘언니 저 떠나요. 더 이상은 모두에게 짐이 될 수 없어요. 정말 죄송했어요. 이곳의 기억은 모두 잊을래요. 다만 한 가지 언니의 눈 속에서 본 파란 희망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언니! 저는 그 희망을 찾아 떠나요. 행복 하세요.’
그녀는 빗속에서 비 갠 후의 하늘을 생각하며 떠났을 것이다. 나는 항상 머릿속에 맑은 하늘을 생각했으니 그녀도 그랬으리라고 난 믿는다. 지금 내게 닥친 건 구름 낀 하늘의 하루라고. 이 하늘이 지나면 밝은 햇살이 비추는 하늘이 올 것이라고. 우울한 날의 가슴 아픈 기억도 끝이라고 믿으며 단 하루도 희망의 하늘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남편은 서로에게 잘된 일이라며 그동안 자신도 힘들었다며, 이제부터는 정말 최선을 다해 앞만 보며 살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진정으로. 그녀가 가고 며칠을 심한 고열에 시달렸다. 꿈속에서는 판도라의 상자가 둥둥 떠다니고, 그 속에는 희망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네 가슴속에 자리 잡고 싶어. 어서 와서 나를 데려가 줘.’
그랬다. 언제나 그곳에서 희망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데려가 줄 누군가를…….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는 지금. 우리 가족은 예전의 평화로움을 되찾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하루하루 즐겁게 살고 있다. 이 여유로운 평화가 언제 또 깨질지, 아니면 계속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만족하고 자잘한 일상이 참 좋다. 생활에 묻혀 일상의 모습들에 익숙해져 가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그녀가 떠오른다. 어느 곳에서 그녀만의 희망을 키우며 살고 있을까.
희망이란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 아직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건 아닐까. 그녀의 눈에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어느 곳에 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