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284

제일 아픈 손가락


BY 둘리나라 2007-09-11

 

                        제목: 제일 아픈 손가락


 아침부터 시작한 비가 오후 늦도록 손바닥으로 땅을 때리며 통곡을 하고 있다. 누가 돌아 가셔서 저리도 목을 놓아 슬피 우는 것일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이방인인 내 눈에도 어느새 비의 눈물이 고여 들고 잔잔한 아픔이 동그랗게 파문을 그렸다. 인적이 끊어져 버린 거리에는 과자 봉지 하나가 빠르게 뒹굴며 문상객임을 증명할 뿐, 온통 서러움에 뒤덮인 세상은 우울하고 슬픈 장송곡만을 끊임없이 연주했다. 봄이 이리 쉽게 가 버릴 줄 알았다면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폼 나게 멋지게 해둘 걸 그랬나 보다.

  2004년의 봄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생을 접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장례식을 치르고 추억이라는 영혼이 되어 버렸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꽃상여를 타고 구슬픈 산길을 돌아나가는 뒷모습에, 남은 계절은 빗소리로 곡소리를 대신할 뿐 바람조차 숨죽여 말이 없었다. 시간은 떠나는 봄이 야속해 자꾸만 앞길을 가로막으며 가지 말라 하지만, 뿌리치고 가 버리는 봄이 무심하기만 했다.

 내 기억 속의 봄은 1992년에 죽음을 맞았는데, 아직도 영혼으로 태어나지를 못하고 정지된 공간에 밀폐되어 있다. 엄마와 헤어지던 그 날 아침 “니하고 내는 전생에 원수였는 갑다”했던 말이 지금까지 메아리가 되어 언제나 봄과 함께 되돌아온다. 고이고이 길러 애지중지 아꼈던 막내딸이 불쑥 데리고 나타난 사람. 어디로 보나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낙제생을 못 면하는 실망스러운 청년이었다. 반대하면 당연히 알아들을 줄 알았던 철부지 딸은 21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 속으로 다이빙을 했고, 그곳은 수영장이 아닌 늪이었다. 버둥대면 버둥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 끝내는 빠져나올 수 없이 모든 걸 삼켜 버리는 거대한 늪. 그때는 몰랐다. 왜 그렇게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매달리며 반대를 하시는지. 인생을 먼저 살아오신 당신의 사람 보는 눈이 길이를 재는 자보다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이란 말 속에는 경험과 연륜과 삶의 지혜가 포함되어 있어, 나이를 먹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다. 그저 반대하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밉고 원망스러워 내가 먼저 등을 보이며 매몰찬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가난한 신혼 생활은 세상을 살아가는 건 사랑만 먹고 배부를 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기에 충분했다. 생명의 연장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공기이지만, 정작 공기만 먹고 살 수 없는 평범한 사실을 뭔가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놀라고 있는 나를 발견과 같음이었다. 다 아는 사실인데 어리석게도 사랑만 있으면 어떤 시련도 헤쳐 나갈 수 있다 큰소리치며 껍데기만 화려하게 치장을 했었다. 단칸 사글셋방에 숟가락 두 개 냄비 하나와 이불. 그것이 전부였지만 행복했고 가슴 깊이 사랑했었다고 엄마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서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음은 당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보다는 결과인 세상. 결국 나는 지지리 궁상맞은 가난한 이혼녀라는 이름표를 달고 하루하루 삶의 출석부에 후회와 아픔이 섞인 도장이 찍어 나가고 있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여자의 일생은 남자로 인해 고달프고 힘든 기라. 그러나 쪼매 좋은 남자를 만나면 살아가는 기 덜 고달프고 덜 힘든 기라. 내를 보거라. 니 아부지와 내가 살아온 세월이 정답 아이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두 분의 결혼생활. 다른 집처럼 싸움을 하거나 폭력이나 술로 가슴앓이를 한 적도 없이 잔잔한 강물처럼 살아 오셨다. 애틋하게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며 사시진 않았지만,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평행선처럼 지내 오셨다. 오랜 시간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셨지만 사랑 보다는 정으로 맺혀져, 더 깊은 끈끈함이 오래된 장맛처럼 구수한 두 분이었다고 기억이 된다. 오히려 그게 더 현명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일지도 모른다. 사는 건 현실이니까.

 우스운 말로 사랑의 유효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3년이라고들 이야기한다. 미칠 듯  보고 싶고 떨리고 그리워해도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다. 예전 같으면 피식하고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세상살이에 어느 정도 때가 묻어 가는구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 오며 얕은 한숨이 목을 차고 올라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계신 당신을 못 본 지가 10년 하고도 2년이 더 흘러 버렸다. 참 못되고 독한 딸이 되어 버린 나를 가끔 거울로 볼 때가 있다. 두 눈을 꼭 감고 찾아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되는 일을 질긴 고래 심줄처럼 버티며 나서지를 못하는 비겁한 여자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볼 때는 괜히 서러워 콧등이 시큰해왔다.

 사랑을 좇아 행방을 감춘 지 1년 후에 갑작스레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이 엄마의 심장을 차디찬 냉동고에 넣고 말았다. 아직도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도려 낼 듯 불어오던 겨울밤이 안쓰럽게 기억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는다. 너무 보고 싶어 찾아갔던 집 앞 골목은 졸다가 놀란 가로등만이 눈을 껌뻑이고 있었고, 몇 시간을 기다려도 당신은 발뒤꿈치조차도 보여주지 않았다.

 대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민 언니가 “가라! 영원히 안 보시겠단다.”했다. 추위에 얼어 버린 몸속으로 눈물들이 훑고 지나가며 시커멓게 멍 자국을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기어이 가슴에다 주홍글씨를 새겨 넣고 말았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식이라고.

 살아 보니 정말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아무리 잘 살려고 노력해도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렸는지 부부의 인연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린 차처럼 빠르게 달려가 끝내는 벽에 부딪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잘 살아서 보기 좋게 성공한 모습 보여 드려 조금이라도 마음 가볍게 해 드리자고 얼마나 다짐을 하고 이를 악 물었는데, 삶이란 놈은 생각한 길로만 걸어가는 착한 녀석이 아니었다. 서른넷의 시간동안 가슴 아픈 일들이 온몸에 생채기를 내고, 잊고 싶은 기억들이 드문드문 흉터를 만들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괴로움의 상처들이 남아 있지만, 살아야겠다는 희망의 새살들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두 딸과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엄마가 계시니 말이다. 자식 낳아 키워 보니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부모의 마음이 알아지고 느껴진다. 그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게 넋두리처럼 말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그런데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고. 아마도 내가 당신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 아닐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2004년의 여름이 죽어 버리기 전에 찾아뵐 것이다.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당신의 품에 안겨 ‘엄마’하고 목이 터져라 부르며 시원한 소낙비처럼 속이 후련하게 울고 싶다. 제일 아픈 손가락이 이제야 찾아왔다며,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장례식이 끝나 버린 세상은 언제 왔는지 여름이 떡 버티고 앉아 주인 행세를 준비하고 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따가운 햇살들이 젖은 거리와 건물들을 말리고 있으니 말이다. 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볕이 참 곱다. 너무 고와서 눈이 따가워 자꾸만 눈 언저리를 닦게 된다. 너무 고와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