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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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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의 행복


BY 둘리나라 2007-09-11

 

                      제목: 남겨진 사람들의 행복


 언양을 지나 한참 달린 차가 운문댐을 넘어서자 하늘이 눈물이 날 만큼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 내릴 듯 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차창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이나 되었던 것처럼 눈발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3월에 보는 눈.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라고 할까. 시원하고, 기분 좋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며 옆구리를 찌르는 친구에게 무작정 이끌려 따라나선 길에서 반가운 선물을 받고 보니 가슴이 설레며 포근하고 살가웠다. 정말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여유로움에 저절로 눈이 감기며 하늘에다 대고 ‘오래 내리게 해 주세요’하고 낯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부탁을 드렸다. 평온함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기에.

 내 나이 서른셋. 10대의 발랄함과 풋풋함 속에서 천방지축 세상을 뛰어다니던 추억도 있고, 20대의 청순함과 도전정신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젊음을 발산하던 그리움도 있고, 이제는 조금은 어른스러워져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맡은 일을 잘해 나가는 책임감이 지워진, 성숙되어 가는 나이이다. 그러나 창에 비친 내 모습은 60대의 할머니처럼 인생을 알아 버리고 지나쳐와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쓸쓸한 노년 같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짙은 한숨이 차 안을 돌아다니다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사랑이라는 부푼 꿈에 이끌려 앞뒤 돌아보지 않고 형광등에 뛰어드는 모기처럼 스물두 살의 내 삶을 한 남자에게 걸었다. 인생이 오직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믿으며 부모도 형제도 버리고 선택한 삶에서 결국 난 실패하고 말았다.

 가난한 이혼녀. 남편의 빚과 아이들은 내 몫으로 남겨졌고, 무언가 부족했던지 덤으로 병든 몸과 상처받은 영혼도 받아 왔다. 정말 완벽하게 짜 맞춘 기가 막힌 10년의 세월이었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억울했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 보지도 못하고, 하얀 웨딩드레스 한번 입어 보지도 못하고, 큰소리치며 제대로 목소리 한번 내 보지도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 와야 한다는 게 소름끼치도록 잔인했다.

 남자가 진저리쳐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도록 나를 만들어 준 일등공신은 당연히 남편이라는 사람이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가슴속에 피멍이 들고 고름이 맺혀 어디서부터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내야 할지 막막해져 온다.

 아버지의 나이 마흔다섯, 엄마의 나이 마흔에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고이고이 컸다. 이미 다 커 버린 언니오빠들에게도 귀여움을 독차지했기에 삶도 순탄하고 행복하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나 한 사람과의 만남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짓이 없고 밝은 사람, 언제나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편하게 해 주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꼈고 무작정 좋았다. 피를 토하며 반대하시는 부모님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불효의 대못을 박고, 깊은 밤 도망을 나오는 선택을 했을 때도 난 행복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날 이후 차를 타면 3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집을 갈 수도 없고, 형제들 얼굴도 볼 수가 없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착하기만 했던 딸의 가출에 충격을 받으신 아버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시고 말았기 때문이다. 숯덩이가 된 가슴을 안고 딸을 찾으신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 모두를 내게서 등을 돌리게 한 이유가 되었다. 내 가슴에는 아직도 아버지라는 아픔이 꼬챙이에 꽂혀 매일매일 세포들을 공격해 밤마다 가위에 눌리게 하고 있다.

 10년 동안 남편이 내게 준 것은 술과 노름과 사람과 여자라는 문제와, 언제나 답은 내가 풀어야 한다는 지독한 시험이었다. 그중 한 가지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데 골고루 당해보았으니 말로 다 쓸 수가 있을까. 20대의 삶을 그 속에서 아파하며 보냈으니 말이다.

 술만 마시면 시비를 걸고, 이유를 만들어 살림을 때려 부수고, 말리면 손찌검을 했다. 멍들어 가는 몸과 사람에 대한 실망이 더해지면 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거기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방안의 주인이 되면 현기증이 나며 맞을 때 보다 더 큰 생채기가 심장곳곳에 생겨났다. 이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게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부모 형제 버린 죄를 받는구나 싶어 이를 악물고 참아 내었다. 술이라면 진저리가 쳐져 고개가 저어지고 미치게 되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술이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사과를 하는 그를 울고불고 매달려 3년 만에 바꿔 놓으니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월급은 고사하고 밥 굶기 일쑤인데 남편의 눈은 쾡 하니 의욕이 없었다. 돈이 된다면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며 아이 책까지 팔아서 노름방으로 향했다. 생활력이 없는 가장의 하루는 같이 사는 사람의 행복은 필요 없고, 한탕만 하면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서히 자신의 목을 죄어나가는 일뿐이었다.

 2년을 사정하고 울었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하니까. 성공한 모습으로 엄마와 형제들을 봐야 용서라도 빌 수 있으니 여기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다 싶었는데 이제는 어이없게도 사람들로 나를 괴롭혔다. 하루도 안 빠지고 3년 동안 우리 집에는 사람이 끊긴 적이 없었다. 밤낮이 없고 새벽이 없이 문을 열면 술 취한 아저씨, 가출한 청소년, 집 잃은 할아버지, 버림받은 할머니 그리고 남편의 친구들과 심지어는 개까지……. 콧구멍만 한 단칸 사글셋방에 방세가 밀려 오늘 쫓겨날지 내일 쫓겨날지 모르는데, 밀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눕힐 때가 없어서 주워 온 흔들의자에 재우고, 어떤 때는 한 달에 쌀 한 가마가 모자라기도 했다. 정말 편하게 방바닥에서 자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 그 시간도 막을 내리려니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터진 것이 여자문제였다.

 한 달에 몇 번씩 일이 생겨 상대방 여자를 만나 호소를 하기도 했고, 정말 큰일에는 상대방 여자의 남편을 만나 눈물로 부탁을 하며 소리 안 나게 마무리 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짓인데, 그래도 아이들의 아빠라고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람피운 여자를 단칸방에 데리고 와서 재우고 입히며 한 달 반을 보냈던 기억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가슴에 새겨져 있다. 가정 이라는 울타리가 무엇이기에, 아빠 없는 아이란 소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질긴 악연의 고리를 그토록 이어오며 버텨 온 것일까.

 10년 동안 일이라고는 담을 쌓았던 남자. 월급봉투를 받는 게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보내다 보니 끝내 받아 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게 참 허허롭다.

채팅을 해서 만났다는 그녀는 너무나 당당하게 남편을 사랑한다며, 인생을 전부 다 걸었다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난 걸까. 남편보다 세 살이 많다는데, 아이 둘을 버리고 밤에 도망을 나왔다 했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난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치러야 할 의식 같은 느낌이 들며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

“내 새끼 아니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네 알아서 해라!”

 그랬다. 우중충한 다방에서 세 사람이 만나 나눈 몇 마디의 대화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만들어 준 것이다. 아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었다.

 1995년 여름, 얼마의 돈을 모아 했던 장사가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게 되어 서울로 도망을 간 적이 있었다. 종묘공원에서 노숙생활을 3개월 할 때 아이는 돌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 분유 값과 기저귀 값에 피눈물을 흘리며 공원벤치에서 잠이 들고, 상가에서 신문 한 장 깔고 잠이 들었던 서러운 나날들에서 얻든 교훈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데…….

 아이라도 고생시키지 않으려 맡길 곳을 찾다가 정보지를 보고 찾아간 곳이 동두천이었다. 미군 부대 뒤의 산에 마을이 있는데, 거기 사시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맡아 키워 주시겠다고 했다. 꼭 찾으러 오겠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하고 이미 차가 끊어진 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난 처음으로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우리 엄마가 내가 떠났을 때 심정이 어땠을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오던 길을 뛰어올라가니 아이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자지러져라 울고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내려오며 다시는 너를 버리는 일은 죽어도 안 하리라 다짐을 하고 맹세를 했었다. 그런데 그날의 남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식도 필요 없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는데 더 이상 말해서 무얼 할까.

“당신 입으로 말했으니 아이들 볼 생각은 하지 마!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야멸치게 외치고 다방을 나오니 비가내리고 있었다. 우울한 비는 그다음날도 하염없이 내려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을 아주 드러눕게 만들었다.

장가 안 간 철부지 아주버님은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으러 집에 드나들기를 5년. 홀로계신 아버님과 큰집에 제사를 모시려는 사람이 없어 제사를 모신 지 3년. 이제 누가 챙기고 돌볼까.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 열이라도 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여기서 끝내고 싶다. 이제는 이 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어 내고 싶다. 더 이상은 같은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싫다, 정말.

 그날부터 텅 빈 방에서 술을 마셨다. 억울해서 마시고, 속상해서 마시고, 인생이 불쌍해서 마시고, 배신감에 치가 떨려 마셨다.

늘어가는 술병만큼이나 영혼은 병들어갔다. 엄마가 왜 그리도 보고 싶을까. 말라 버린 눈물샘에서도 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왔다.

목이 메어 가슴을 쥐어뜯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를 얼마나 했을까. 돌아보니 아이들이 보였다.

 불안한 눈으로 떨고 있는 내 분신이 그림자처럼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

살아야 했다. 아이들과 미래를 위해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열 살 된 큰아이와 여섯 살 된 작은아이를 앞에 앉히고 엄마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아이가 아빠는 아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갔으니 엄마도 엄마와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며 안아주었다.

 어리게만 생각했는데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며 용기를 주었다.

나는 집의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 그동안의 쌓였던 먼지들을 털어내며 정리를 해 나갔다. 남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물건들을 치우고, 직장도 알아보고,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몇 달 후 우리는 이혼을 했고, 그녀에게 잘살라며 손을 잡아줄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을 찾았다. 이제부터는 행복하게 살아 볼 생각이라며 남편에게 행복하라는 마지막 말도 전했다.

 큰아이는 장미를 잘 사온다. 심부름을 시키면 남은 돈으로 한 송이의 장미를 사 와 엄마를 기쁘게 하고, 늦게 오면 동생의 밥이며 설거지도 곧잘 하곤 한다. 예전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참 많이 웃는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마 내 모습에도 변화가 생기리라 믿는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붙어서 나를 괴롭히는 절망이라는 놈을 버리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던 생각이 나며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난 참 많이 가진 부자인가 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고, 전혀 비난하거나 손가락질 않고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있으며, 단칸 사글셋방이지만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 있고, 아프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있으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입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으니,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정말 사랑이 흐르는 눈으로 행복을 보고 있었다. 아! 3월의 눈이 봄바람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며 자꾸만 눈을 시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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