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박영애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문이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출입과 채광을 위해 만드는 문, 학생들이 한 번쯤 거쳐야할 입시의 문, 사회인으로서의 첫출발인 취업의 문, 마음의 문등. 우리는 이런 문들을 거쳐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간다. 이들 문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 나는 건물에 반듯하게 난 문을 제일 좋아한다. 이때의 문은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통로이다. 문을 통해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내부에서는 문을 통해 외부와의 연락을 취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들여온다.
문은 쓰임새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르다. 대문은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고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들여와야 하므로 어지간한 물건도 쑥쑥 들어올 수 있도록 커야한다. 또한 대문은 집안으로 들어서는 첫 통로이므로 아름답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어야한다. 더러는 번지르르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아주 형편없는 경우도 있지만, 출입문의 이미지가 깔끔하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갈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경우도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속은 아주 텅 빈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겉모습을 중요시하므로 소홀히 할 수 도 없다.
나는 가끔씩 우리의 전통가옥을 감상할 기회를 갖는다. 아파트 철대문의 딱딱함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현대인의 한사람으로, 태극문양을 아로새긴 전통가옥의 나무로 만든 문은 참으로 친근감이 든다. 금방이라도 댕기드린 낭자가 살포시 웃음지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 옛날 사람들은 문 하나에도 많은 정성을 들였다. 태극문양을 새겨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크기를 달리해 건물의 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격이 높기로 말하면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솟을삼문은 품위 있고 아름답다. 대문의 지붕 또한 책을 펼쳐 놓은 듯한 맞배지붕으로 운치를 더한다. 보통 문은 두 쪽으로 되어있어 앞으로 당기거나 밀어서 여닫도록 되어있다.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잠금장치로는 빗장을 걸도록 만들었다. 평소에는 이 빗장을 걸어놓았다가 집안에 용무가 있는 사람은 밖에서 '이리 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문을 열게 했다. 그런 때는 대개 집안의 하인이 쪼르르 달려나와 빗장을 풀고 문을 열어 주었다. 요즘은 이 잠금 장치도 버튼하나면 집안에서 대문을 열 수 있도록 되어있어 사람대신 기계가 문을 열어준다.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경계해야 할 대상이 많아 문을 단단히 잠그고 들어앉아 있어야하는 사실이 서글프다.
어린시절, 하루종일 대문을 열어놓고 지내면서도 경계의 마음이 들지 않던 그 시절이 그립다. 대문을 마음대로 열어젖히고 동네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동네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묻고 그렇게 여유롭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집의 구조 중 대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창문이다. 창문을 여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숨김이 없는 사람은 우선 집안에 들어서면 창문부터 다 열어 젖혀야 속이 시원하다. 그에 반해 마음 속에 모든 것을 많이 담아놓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창문 또한 꼭꼭 닫아놓거나 조금만 열어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창문은 햇볕이 잘 드는 위치에 내야하고 통풍이 잘 되어야 창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창문이 너무 낮은 곳에 있으면 밖에서 안의 모습이 너무 훤히 드러나 좋지 않고 창문이 너무 높으면 통풍이 잘되지 않아 공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불편하다.
창문은 장식에 따라 방의 분위기를 많이 좌우한다.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천으로 커텐을 해야한다. 고요한 달빛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창에 레이스가 많이 달린 커텐을 만들어 달면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모습이 참으로 운치 있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가끔 늦은 밤에 창을 통해 고요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도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반짝이는 별까지 친구 해 줄 때면 나는 어린왕자처럼 순수한 마음이 된다. 그 순간은 생활 속의 욕심이나 성냄 등의 격한 감정이 잔잔하게 가라앉음을 느낀다.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창문을 통해 연인들이 사랑을 전하는 장면이 종종나온다. 기타반주에 맞추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프로포즈를 하고,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하기도 한다. ‘창문’이라는 단어는 ‘낭만적’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처음의 창문은 집안의 채광과 통풍을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옛날 할아버지들은 창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밤손님들은 이곳을 통해 집안으로 침입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사용하는 사람이 잘 사용해야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좋은 용도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 전에 ‘오아시스’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설경구)이 뇌성마비 여자친구(문소리)를 위해 밤에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쳐내는 장면을 보았다. 여자친구는 밤에 창문에 비친 나뭇가지 그림자를 무섭다고 싫어했다. 잡히면 곧장 경찰에 연행될 상황에서 여자친구를 위해 애쓰는 남자주인공의 마음이 나에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창문’은 나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
나는 어린시절 창문이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소망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창문이 지금처럼 시원스럽게 크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벽면의 반정도가 창문으로 어린시절의 바람을 이룬 셈이다.
문은 집의 구조상 대문이든 창문이든 다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데서 사소한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면 그곳이 낙원이다’라는 말처럼 마음의 빗장을 풀고 한 발 다가가면 그만큼 가까워지게 된다. 겪어보지 않고 소문만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일은 숲만 보고 나무의 수려함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