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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 간 년


BY 박 소영 2009-07-30

살로 간 년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서 50년 전 술집외상 장부를 보고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외상장부가 어디에 술집에만 있으랴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거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60년대 중반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졸업과 동시에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 KT&G 전신인 전매청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담배생산이 완전 기계화가 되기

 전이라 수작업이 많았다.자연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여자들의 몫이었다.아가씨부터

 며느리를 본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져 입사한 배경도 각각 이었다. 국영기업체라

 보수도 공무원 규정에 준하였고,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신분보장이 되어 있었다. 비록

생산직이라 할지라도 그 채용자의 배경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많았기에 현장 상사들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하였다.

 

군사정부 때라 육이오 미망인, 유자녀, 국가유공자 가족이 우선으로 채용되었다. 제일 번성기 때

회사원이 약 2,000명이라고 기억되니 거대 시장이기도 했다. 그중 70%가 여자니까 가정 살림에

 필요한 물건이 쉬는 시간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백화점에서 온 일류 의류에서 반찬까지

봉급 다음 날에는 외상 값, 계금 각종 돈이 오가느라 현장에는 한참동안 술렁거린다.

 

조카 공부를 시키려고 참기름을 파는 유머가 넘치는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내가 20대 일 때

그 아주머니가 40 중반이니 한참 위다. 어느 날 현장에 다녀온 직원이 우스워 죽겠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인즉 그 아주머니가 외상값을 받으려니 전 공장직원 이름을 기억 하질 못하여 자기만

알도록 외상 장부를 정리하였다. 장부에는 ‘거센 년’, ‘딸기코’, ‘홍 씨’ 마누라 많은 놈,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사람을 나름대로 적어 두었다. 문제는 ‘살로 간 년’ 이었다. 육이오 미망인으로

 채용되어 혼자 살다가 재직 중 재혼한 아주머니에게 붙여준 장부상 이름이다.

 

 돈을 주고 치부장을 들여다보는데 살로 간 년에다 연필로 줄을 긋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아주머니는 “그라마 죽을라고 갔을까봐” 이름 놔두고 살로 간 년이뭔기요 하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유머 넘치는 아주머니는 너는 그래도 살자고 하는 사람이 있어

 좋쟎느냐 ? 나는 살로 갈려도 아무 넘도 델고 살자고 하는 넘이 없다 욕 아니다 진정해라

 하면서 간신히 달래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고 했다.

 

자기주장이 강한 요즈음은 여자들이 무조건 희생하고 살지를 않는다. 뜻이 맞지 않아 이혼하는

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세상이다. 요즈음 부모들, 오죽하면 둘이 애 데리고 붙어살면 효자라고

 하지 않는가? 전사한 남편 덕에 직장을 얻었는데 재혼했다고 부쳐준 별명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살로 간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 공장 유명세를 탔다.

 

 어느 미망인은 돈 벌어 객지에 공부하러 온 시댁 조카와 시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혼자 된지

 20여 년 만에 재혼 하려니 시어머니와 시숙이 통곡하더라는 아픈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그 시대의 재혼한 사람들이었다. 결혼 직후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남편은 군에 가서 전사하고

제수씨가 재혼 할까봐 유복자를 몰래 시숙호적에 얹었다가 재판으로 다시 찾아 남편이 준

직장이라고 고마워하고 사는 미망인도 있었다.

 

 재혼하지 않는 미망인, 스무 살에 만나 석 달 살은 내 낭군, 정년 되어 나가면 유족연금도

 준다면서 기억도 희미한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한 점 혈육을 잘 키우는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살로 간년은 전쟁이 안겨준 세월의 호칭이다. 부모 없는 불쌍한 자식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하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교수로 의사로 판검사로 어머니의 보람을 안겨준 자식들도 많아 퇴직

할 때 쯤 주위에 부러움을 산 분 들도 많았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한 끼 밥을 걱정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들의 반듯한 자식 교육은 후세들이 본받을 점이다. 그런 분들이 키워 준 자식들의

 힘으로 우리나라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살로 간 년 좋은 별명은 아닌데 육십 중반에 와 있는

 나는 80을 훌쩍 넘어 생사도 알 수 없는 그 분들의 모습이 이리도 생생할까? 신문에 나온

그 외상장부가 그 분들의 장부라 40년도 훨씬 전 일이 내 앞에 그려진다. 살로 간년

 아주머니는 살았을까? 또 장부의 주인공도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