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931

아들아


BY 박 소영 2008-09-23

몸이 아픈 후 그동안 아팠던 세월들이 차츰 차츰 기쁨으로 돌아온다. 이글을 쓸 수 있는 맘도 지난 아픔을 말 할 수 있는 여건이 된 지금이 행복하다.

근기야!

너무도 후회했던 결혼생활 그 첫째 잘못이 내게 있었다는 결론과 피할 수 없었던 그때 상황들이 내 평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것임을 알고 지금부터 엄마의 살아온 과정을 언제 갈지 모르는 내가 너의 게 남기고 싶다. 살아가면서 참고하여라.

엄마는 부자는 아니지만 가족이 서로 아껴 줄줄 아는 보통 가정의 맏딸로 태어났다. 외가 쪽은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셋 고모를 어릴 때 홍역으로 잃고 삼촌은 6.25때 전사하셔서 무매독자인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 삼남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인심 집으로 소문난 가족은 지나고 보니 너무도 단란했다고 느꼈다. 때로는 싸우는 것도 보고 고함소리도 들었다면 결혼생활을 그토록 힘들어하진 안했을 걸 보통가정에 있었던 일이 나에게는 너무도 생소했단다.

 

딸이 없는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쏟은 정은 결혼 후 내가 두고두고 부러웠던 점이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보고 “우리보배” 라고 너희들이 시집가서 엄마만큼 하라고 하신 말씀, 어머니 역시 보통 며느린데 할머니가 추켜 세워주는 바람에 더 잘하게 되더라는 고부간의 서로 사랑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없지만 서로서로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란 엄마는 형편은 안됐지만 부모님의 교육열로 도시에 나와 학교도 다니고 그처럼 힘들었던 직장도 가지게 되었다.

 

직장에 들어오고 보니 직장생활로 가정의 보탬을 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모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엄마 월급을 그대로 모으도록 하시고 잡비와 의복 세집 얻는 것 까지 모두 대어 주셨다. 엄마 또한 알뜰해서 부모님이 항상 알뜰하고 착하다면서 결혼자금으로 모으라고 하셔서 열심히 돈을 모아 동료들의 부러워했다. 아버지의 기쁨도 잠시 어느 날 병원에서 손을 댈 수 없는 말기 암 이란 진단을 받고 엄마의 결혼적령기에 세상을 떠나셨다. 너무도 내가 존경하던 우리 아버지 자식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 따라가실 아버지를 그렇게 여의고 아버지 연세 52세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젊으신 연세에 가셨지만 집안 대소사며, 부모공경, 자녀양육,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하지 않으셨던 분이라

외할머니의 흐느낌이 잊혀지질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가 가슴 찡하다. “자네 없는 우리집에 와서 고생 많아하였소. 결혼 때 미안함을 평생 안고 가게 되고 어메와 아이들 혼사를 혼자 맡게 됐구려 미안하오”. “외할머니께서는 당신 만난 덕분으로 나는 시어른과 동네 어른분들 사랑까지 받아 없지만 행복하였소. 그리고 아이들 잘 커주었고요” 마지막 외할아버지 부부가 남긴 대화다. 얼떨결에 짐을 맡은 외할머니는 결혼 적령기에 닿은 엄마와 이모의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가신 3개월 후 외증조모님이 아들 따라 가셨다. 할머니는 혼자 시골에서 과수원을 돌보시면서 외로움을 달래시며 어떠한 자리에 결혼을 시킬까 일구월심이었다. 비교적 평판이 좋았던 엄마는 여기저기서 선 자리가 나왔다. 그중 한사람이 너의 고종고모님이다. 엄마를 너무 좋아했던 연세 많으신 분이 좋은 자리에 중매를 쓰려고 애쓰신 분이 있었다. 고모님과 친한 그 분은 나를 먼발치에서 보고 갔고 주위에 평판이 알뜰하고 착하다는 소문에 너의 아버지와 인연이 되도록 주선하셨다. 인연이란 이상하지 엄마를 좋아하던 동료가 내 자리에 자주 찾아왔다. 그는 4남매 맏이였다. 그 당시 전국 명문이었다고 하는 경북고등학교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녔다. 대구에서 조부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어렵게 살았다. 매일 똑같은 옷에 헙수룩한 차림 엄마도 인물이 없었지만 그 남자의 인물은 정말 시골티가 났다. 하지만 착한 천성이 눈에 보여 엄마가 좋아하게 됨을 알자 엄마를 아끼는 그 분은 한사코 말렸다. 맏며느리에 층층시하에 없는 살림 인물까지 빠진다고 근처에 오기만하면 나를 불러내어 맘을 주지마르라고 다짐했다. 물론 나를 생각해서 그런 줄은 안다. 그 남자 역시 그 아주머니를 무척 싫어했다. “ 박 양이 왜 저런 늙은 분과 친하게 지내느냐고 왠지 마귀할멈 같아서 싫다고 했다. 정년을 코앞에 둔 그 분을 그렇게 평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중매한 시누이의 말에 나는 그 총각과 푹 정이 들지 않았던 나는 어른들의 말에 맘이 흔들렸다. 그렇다고 사랑의 고백을 받은 처지도 아니고 서로 눈빛으로 감을 잡은 상태라 일단은 선보기로 작정을 했다. 시누이의 말을 빌리자면 그 총각과는 비교도 안되는 좋은 혼처였다.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이씨인 양반집 가문에 8남매를 둔 다복한 가정에 7째 모두가 대학을 다닌 시골서는 명문 집안 이였다. 단지 흠이라면 근래의 큰형님의 실수로 가산이 많이 기울어져서 대학 일 년을 남기고 직장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것도 고대를 다니다 말았다는 말에 엄마는 가슴이 아팠다. 알뜰하게 해서 돈을 모아둔걸 아는 분은 돈 놔두었다가 뭐 할래 남편 출세시키면 너 공이 빛나질 않겠느냐? 선을 한번 보아라고 해서 대답을 했다.

 

선보기로 약속한 날 연탄 가스가 취해서 머리가 끊어져 나갈것 같았다. 기분이 별로 였다. 오후 시간 보고싶지 않다는 말에 결근을 한 고종 시누이는 성이 노발 대발 났다. 안하는거는 본인 마음인데 보려고 온 사람 보라는 성화다. 미장원을 다녀와서 약속장소에 갔다. 들은대로 양반집 자재같이 보였다. 가정사를 묻는다 왜그리 떨리는지 그런데 조금은 성깔이 있어 보였다. 아니 몹시 그랬다. 직업도 순경이라 맘에 들지를 안했고 왠지 꿈도 뒤숭숭했다. 잠시 후 헤어지고 맘이 착찹해 그저 그렇다는 내 의견을 던졌다. 나와 친한 아주머니는 고종 시누이에게 푹 빠졌다. 너가 고생해라 너 돈 있잖아 신랑 공부하도록 해줘라 고대라면 명문대가 아니냐 명문집안에 명문대에 나의게는 과했다. 그러나 상대의 집안결정은 아직 들어보질 못했다. 그래저래 며칠을 보냈다. 어머니도 꿈이 않좋다면서 꿈이 무슨 필요있겠는냐 그만하면 우리에겐 과하다.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병혼이 잖느냐 그 집 처분만 기다리자 그래저래 ㄴ날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