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755

엄마, 어무이


BY 박 소영 2008-09-20

엄마! 어~무이!

박 정 애

 

암수술을 받은 후 운동하는 것을 일상에서 빼놓지를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권고를 받고 거의 매일 가벼운 걷기 운동을 한다.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던 나는 생명과 관계 된다는 경고를 받고는 처음엔 억지로, 지금은 생활의 일부라 생각하고 열심히 한다.

 

운동 장소는 Y대학교 교정이다. 대학 안에 야산이 있어 산에 오르기도 하고 교정을 걷기도 한다. 4~50분 정도 운동량을 정하여 걷는 동안 기도도하고 자연과 대화도 한다. 못 둑을 거닐면서 연꽃과, 먹이를 찾아 바쁘게 자맥질하는 청둥오리와도 대화 한다. 다람쥐 대신 도토리나무를 차지한 청설모가 푸릇한 도토리를 갉아먹으니 껍데기와 실가지가 떨어져 길에 수북하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나는, 때때로 여물기도 전에 청설모 밥이 된 빈 껍질을 세어 보기도 한다.

아들 직장이 대학 안에 있기에 거의 매일 그 건물 앞을 지나게 된다. 가끔 직원들이 베란다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담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큰 건물 안에 아들이 근무하는 방은 어딘지 모르지만 자연히 건물 쪽을 쳐다보게 된다. 오늘도 묵주를 굴리면서 학교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9월의 볕이 따갑긴 하지만, 가을의 문턱인 듯 생각이 깊어질 때 어디선가 “엄마,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사로이 들었다. 더 큰 소리로 “어무이!”라고 부르는 귀에 익은 부름에 힐끗 쳐다보았다. 삼층 베란다에서 직원 서넛과 같이한 아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크게 손을 흔들어 답을 했다. 옆에 있던 아들의 동료들도 함빡 웃으면서 같이 손을 흔든다.

눈물이 확 쏟아진다. 엄마를 부르기 위해 옆의 동료도 생각지 않고, 그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내 아들,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지금 쯤 이다. 큰 아들이 다섯 살, 작은 아들이 세 살 때, 내 아이들을 돌봐주던 애가 추석을 쇠러 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밥상에 밥과 간식만 얹어 놓고 출근을 했다. 세든 사람에게 부탁은 했지만 종일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염려하던 대로 퇴근을 하니 작은 아이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대방 아이 엄마가 내 아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병원을 다녀왔다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 괜찮다고 했지만 서러워서 혼자 밤새도록 울었다. 남편은 먼 곳에서 근무 하고 있는 터라 혼자 이런저런 서러움에 울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학교 입학 후로는 아예 저희끼리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다시피 했던 내 아이들이다. 두 살 위인 형이 동생을 돌보아 주었다. 어린 형제가 다정스레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을 본 이웃들이 많은 칭찬을 했다. 그때의 형제애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어두워야 퇴근했던 직장 생활, 토요일은 말할 것 없고, 바쁠 때는 일요일도 출근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추억이 될 만한 나들이를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언젠가 큰 아들에게 얘기 한 적이 있다. “나는 다른 엄마처럼 내가 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소리 할 자격은 없다. 너희가 알아서 컸으니까?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고 하니 “ 엄마가 고생 한 거 저희가 다 알아요. 보고 컸잖아요.” 했다.

 

지난 봄, 큰 아들 박사 수여식 때도 눈물이 흘렀다. 나에게 박사모를 씌워 사진을 찍으려 했을 때, 나는 한사코 거절 했다. 대학 때부터 장학금, 조교 생활, 석사 후론 줄곧 강사 생활을 하며 스스로 노력한 대가였다. 부모로서 크게 밀어 준 게 없기 때문이다. 먼저 결혼한 작은 아이는 직장을 다니면서 석사과정을 했다. 빠듯한 봉급에 며느리도 공부방을 하면서 힘을 많이 실어주었다. 스스로 일어선 내 아이들, 그러 했던 아들이 주위 살필 겨를 없이 “엄마! 어무이!" 라고 불러댄다.

 

 

행복한 눈물이다. 어떠한 치유방법이 이 보다 더 클까? 삶의 끝이 저만큼 보인다고 생각하니 사람의 한 평생도 너무 잠깐이다 싶었다. 어느새 60 고개를 훌쩍 넘어 서고 말았다. 고장이 난 기계는 수선을 요한다. 처방 해준 한보따리 약을 약 케이스에 담으면서 세월이 흐르면 당겨져야 하는 삶의 마감을 약의 힘에 의지 하고 있다. 예전에 동료들과 짧게 굵게 살고 싶다고 했던 욕망이 이젠 가느나마 좀 더 길게 살기를 원하는 바람으로 둔갑하고 있다. 장기 복용하여야 하는 항암약과 운동이 생명의 연장 줄이라 생각하며 매달리고 있으니 하느님 대하기가 부끄러워진다.

 

다섯 살짜리 손녀는 수술 후 집에만 오면 누워있는 나의 배를 열어 본다.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할머니가 야속한지, “할머니는 왜 배를 째서 이렇게 피가 묻었느냐.” 라고 하며 무척 안스러워 한다. “ 할머니가 음식을 골고루 먹지 않아 암이 생겼다. 너는 골고루 잘 먹어야 한다.” 라고 하니 죽만 먹는 나를 보고 엉엉 울며 “할머니 골고루 잡수세요.” 라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다섯 살 손녀 얼굴에서 세 살적 내 아들의 그림이 그려진다. 아비에게 못 다한 정을 손녀에게 주고 싶다. 어린이집을 다녀온 후 손녀는 전화를 건다. 아픈 나를 두고 며느리가 “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니 가지 마라.” 라고 자제를 시키지만 아랑곳 않는다. 때로는 울음에 찬 목소리로 “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할머니 현관 문 앞에서 기다려 주세요.” 라고 하고는 백 미터 거리의 앞 동에서 쫓아오는 모습이 나비같이 나풀거린다. 없던 기운이 생긴다. 현관 번호판에 손이 닿지 않는 손녀가 기다리지 않게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아들아! 얼른 나아서 너에게 못 다한 정을 너의 딸에게 해 주마. 그리고 엄마! 라고 부르는 네 부름은 나의 가슴에 영원히 간직할게 고맙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