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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미소


BY 박 소영 2007-02-21

선생님의 미소

박 소 영

반월당역에서 손녀의 손을 잡고 차를 기다리는 중 노신사 한 분이 “보자, 아는 사람 아닌가?"라고 하면서 내 앞으로 다가 오신다. 환한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무척 반가워 하신다.

초등학교 선배, 직장 선배, 이웃으로 살았던 분?, 잠시나마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즈음 섬광처럼 스치는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조회 때마다 특유의 밝은 미소로 우리를 대해 주시던 고 2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너무 오랫만입니다.”사십 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었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보셨을까? 박 누구더라 하시며 성까지 기억하고 계시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당황스럽고 죄송스러워 어찌할 바 몰랐다. 단발머리 소녀가 손녀의 손을 잡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같은 도시 안에 살면서 한번도 뵈온 적 없이 까맣게 잊고 살지 않았는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적 없었고, 말썽꾸러기라서 선생님을 애태운 일 없었던 고등학교시절이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평범했던 아이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히 만나지는 제자 앞에서 이름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남편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요즈음도 제자를 기억하려고 학교의 앨범을 뒤적일 때가 가끔 있다. 퇴직 후 어쩌다가 제자로부터 전화가 오면 정성 다하여 받는다. 이런 남편을 지켜보면서도 그 어느 선생님께도 전화 한번 한 적 없이 지냈다.

지난 날, 남편이 들고 온 졸업앨범에서 여고 때 선생님을 발견하고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다음날 남편은 자기 스승을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드렸고, 그 선생님께선 친히 집으로 전화를 주셔서 당황했던 때가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앞의 여인이 갑자기 피하거나, 양산을 내려쓰면 틀림없이 여학교 제자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었다. 일부러 피하지는 않았지만 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교사였던 남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아들, 선생님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정작 잊고 살았다.

치맛바람이니 사교육이니 하는 말에 크게 가슴앓이를 않았던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나 역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아래서 어렵게 공부했다. 딸이 낯선 곳에서 기죽을까봐 수업료 통지서가 나올 무렵이면 등록금을 일찍 장만해 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생님앞에 그려진다. 자취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연탄불이 꺼진 날엔 굶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한 것을 무척 걱정하여 주셨던 선생님,“연탄불 잘 간수 하그래이, 부모님은 자주 올라오시나?”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시골뜨기를 감싸주시고 안쓰러워 하셨던 선생님이셨다.

반 백년이 다 된 세월이 흘렀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잊고 살았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선생님의 진한 사랑을 다시 느낀다.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선생님께선 고인이 된 친구의 상문을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은빛 머리카락에서 존경스러움이 묻어난다. 제때 염색하지 않아 허옇게 드러난 머리카락으로 선생님 앞에 서 있는 게 웬지 죄스럽기만 하였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친구의 부음을 연락받고 찾아갈 수 있는 건강에 감사한다고 하신다. 그렇다, 언제 가실지 모르는 연세이시지 않은가.

명함이 있으면 한 장 달라고 했더니 오래 전에 쓰던 명함이라 누구에게나 주지를 않는다고 하시면서 대학동창회장, 문중회장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건네주셨다. 언제 한번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먼저 온 전철을 탔다.

차 안에 들어서면서 후회를 했다. 선생님을 먼저 보내드리고 다음 차를 타야 하는 기본 예의도 갖추지 못한 나를 두고 선생님께선 얼마나 야속해 하셨을까? 움직이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선생님은 내가 탄 차를 향해 서 계신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변함없는 그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신다. 꼭 찾아뵙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손에 쥔 명함을 지갑 깊은 곳에 넣었다.

차는 달리고 생각은 지난 세월에 머물고 있었다. 추억과 현실을 함께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내가 선생님의 나이가 되는 날 선생님을 또 만난다 해도 선생님의 그 미소는 여전하리라. 선생님, 만수무강 누리시기를 제자는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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