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햅쌀 두 포대


BY 박 소영 2007-02-20

햅쌀 두 포대

20kg 쌀 두 포대를 포개어 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가게에서 들여온 쌀이 아니라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장만한 논에서 거둬들인 것이라 더욱 살가운정이 간다. 평소에 먹던 쌀과 같은 모양을 지닌 쌀일 뿐인데 그 느낌 이렇게 다른가.

퇴직 후 남편은 양식은 우리 손으로 지은 곡식으로 해야 한다면서 논을 사자고 했다. 처음엔 향수에 젖어서 하는 말이겠지 하고 예사로 들었다. 날이 지날수록 논 사자는 말이 노래처럼 이어졌다. 시댁 곳, 친정 곳 두루 둘러본 결과 대구에서 나다니기 쉬운 경산시 지역의 논을 사게 되었다.

막상 농사를 지으려니 일시에 농기구 구입비도 만만찮았고, 자랄 때 아버지를 도왔던 영농기술밖에 몰라 남편은 연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마침 이전 땅 주인이 찾아와서 농사를 자기들이 2년동안만 짓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땅 사자고 조르던 남편은 혼자 감당하기에 자신이 없는지 지금부터 2 년동안은 수련기로 삼겠다고 하며 같이 짓자고 했다.

남편은 봄부터 논 주변을 부지런히 나다녔다. 모내기 때는 경운기도 직접 운전해 보기도 하고 물 대는 일, 이웃 논 주인들과도 안면을 익혀 갔다. 낱알이 충실히 익어가는 걸 보고는 만족해하면서 쌀을 찧을 때는 입회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1차적으로 찧어온 쌀이다.

쌀 포대를 보면서 40년도 훨씬 지난 옛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겨울 방학이 가까워 올 무렵이면 정부의 나락 수매로 온 마을이 시끌벅적해졌다. 제마다 등급을 잘 받으려는 농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마음이다.

한 해 동안 애써 지은 농사였지만 항상 빠듯했던 우리 집 형편이었다. 덩그렇게 서 있던 두 개의 ‘두지'가 수매로 사라지면 자식들 학비 조달과 연세 높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한 해를 꾸려갈 일에 걱정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히 떠오른다.

고 2 여름방학 때였다. 흉년으로 마당에 세워진 두 개의 나락 '두지'가 예년보다는 작은 느낌이 들었던 해다. 집 밖에 다녀오시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께서 황급히 다가가셨다. 외양간 옆에서서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시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란히 함께 들어오셨다. 곧 방학이 끝나면 내가 가지고 가야 할 등록금 문제로 걱정하시고 계심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아버지께선 나의 학비와 방세 등 생활비를 주시면서 얼마 있다가 좀 더 마련해 줄 테니 우선 쓰라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심하여 갖고 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열 달치 방세를 선금으로 줘야 하는 달이면 아버지 허리가 휘청한다. 나에게 주신 돈이 금방 없어지리라는 계산을 하신 아버지는 곧 더 장만해 주리라는 약속을 하신다. 나는 집안 구석구석에서 돈이 될 물건을 찾아본다. 추수할 시기도 멀었고 키우고 있는 가축의 새끼들도 팔기에는 아직은 좀 이르다. 무슨 수로 돈을 장만하실까? 돈 문제로 자식들 앞에 좀처럼 내색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어려움은 아버지 엄마 모습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의자에 걸터 앉아 무심히 본 책꽂이, 책사이에 아버지께서 써 오시던 가계부가 눈에 띄었다. 보고 싶었다. 깨알같은 글자를 통해 최근의 상황을 알 수있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문중 살림을 맡으신 아버지께서 문중의 장리쌀을 받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튿날 오후 내가 대구로 가지고 갈 반찬이며, 쌀자루 등 올망졸망한 여러 뭉치가 마루 끝에 놓여있었다. 내가 울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장리쌀을 얻어 쓰면서까지 뛰어나게 공부도 잘 하지도 않은 나에 비해 부모님의 희생이 너무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작은 방으로 조용히 부르셨다. "내 수첩을 너가 봤구나. 작년에 흉년이 들어 그렇지 올 농사만 잘되면 얼마만큼은 갚을 수 있다. 머잖은 고생이다. 얼마 있으면 오빠도 돈을 벌 것이고" 라고 하시면서 나를 달래셨다.

내 눈으로 본 장리쌀은 적은 양이 아니었다. 가정경제를 남편이 꾸려가던 시절, 아버지는 알뜰하고 자상하고 효자이셨다. 담배 한 갑이면 사나흘씩 피우시는 아버지,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재봉틀이 귀하던 시절 품앗이 하기 위한 어머니의 바느질 소리는 밤이 이슥하도록 들렸다. 이토록 열심히 살아도 남의 빚을 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놀랍고도 서러웠다.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오신 아버지의 뒷모습, 왜소해 보이는 두 어깨에 가족을 지키려는 짐이 너무도 무겁게 얹혀 있었다.

몇년 후, 오빠와 내가 차례로 취직이 되었고 오빠 결혼과 함께 남부럽잖게 갖추어 살림을 내놨다. 호사다마인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움이 생겨 아버지의 어깨가 가벼워지나 싶더니 무서운 병마는 아버지 온몸을 짓눌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께 드린 나의 봉급 봉투는 한 푼도 쓰지 않으신 채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이 아버지 머리맡 서랍 안에 소중하게 갈무리 되어 있었다. 나의 봉급 봉투를 들고 농협에 저금하러 가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더 이상은 손을 쓸 수 없는 말기 암입니다."라고 한 의사의 말에 묻혀 저금 통장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가시고기? 온몸으로 희생하시다가 자식들이 자립할 때가 되니 홀연히 가셨다. 그 당시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망보험까지 넣어두셔서 마지막 가시는 저승길 노자 돈도 당신이 장만해 떠나셨다. 향년 52세, 그토록 사랑하던 딸의 결혼도 못 보시고 가신 지 올해로 37년째다.

참살이 쌀이니 친환경 쌀이니 따지지 않아도 시골에서는 부자의 상징이었던 쌀, 묵은 쌀과 섞이지 아니한 우리 논에서 거둔 햅쌀로 가족들의 입맛을 돋우리라는 내 마음이 어느새 먼 옛날로 돌아가 아버지가 갚으실 무거운 장리쌀과 비교되어 가슴에 박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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