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장의 아내역은 참으로 힘들다. 숯불갈비집의 매니저 역할은 더군다나 힘들다.
지인들은 쉽게 말들을 한다. 아홉남매 중의 막내에게 시집와서 얼마나 편하겠냐고.
머리 아플 일이 없으니 그 아니 행복하겠느냐고. 먹는 장사는 거저 남는다는 데 쉽게 돈 버는 거 아니냐고.
그러면 나는 말쌈없이 그냥 웃음을 머금으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또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내 삶이 하나의 연기라면 이쯤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와야 정석이 아닐까?
이팔청춘은 아니었지만 이십대 초반, 첫눈에 불이 붙어 밤낮으로 상열지사의 나날을 보낸 우리로서는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장미의 나날이었다. -비록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을 지언정- 그러나 이십여 년이 흐르고 피부가 오래 된 살림살이만큼 주름으로 얼룩진 지금, 불혹이라는 문간을 뛰어넘은 상황에서 나는 무언지 모를 적막감에 사로잡히려 한다.
근래에 남편은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꽤나 밖으로 도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런 것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결혼생활이 스무 두 해나 지났음에도 나는 남편이 그립다. 워크 샵이다 미팅이다해서 이틀이 멀다하고 한잔 술을 기울이러 나가는 남편... 저녁 여섯 시쯤이면 어김없이 남편의 벨이 울린다. 그는 무던히도 자신의 휴대전화를 사랑하는 거 같아 보인다. 물론 전화기 안에 담긴 친구들을 사랑하는 거겠지만.
남편 대신, 아니 이제는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식당을 경영하고 있음을 느낀다. 식당은 우리 부부의 삶의 기둥이며 활활 타 오르는 장작과도 같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작업에, 한결같은 일상이지만 이 일을 팽개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시어머니 기일에도 참석을 못했다. 그게 식당 일하는 막내며느리의 특권이었을까? 누가 뭐라 질책을 해도 맞다고 하련다. 작년 겨울에 있은 친정엄마 제삿날도 아버지 생신도 그만 까 먹어 버렸다. 연말이라 힘들었다는 말과 온 몸이 마디마디 아팠었다는 표현이 스스로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내게 아무런 말도 없는 친정식구들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내 삶이 이거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니 사뭇 자괴감마저 든다. 그저 시댁이나 친정식구들에게 면목이 없음을......
아이러닉하게도 남편은 어머니 제사를 고이 모셔왔다. 아마도 형님들께서 막내동서가 괘씸 했나보다. 아니다. 아마도 그 분들의 형편이 힘들었음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련다. 자식들을 가르치고 출가 시키려다 보니 제사가 만만치 않았을지 모르겠다. 설마 며느리들간의 알력 다툼은 아니겠다. 어차피 엎지러진 물인데 남편과 내가 해야 할 일 아닌가.
남편이 물을 떠 놓고 절을 드린다.
할 말이 없다.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 외에는.
나도 힘이 들지만 그는 얼마나 비통해 할까.
보는 내 눈이 안타깝다.
가슴으로 울고 있음이다.
지금도 남편은 사랑하는 애인(술)을 그 덩치만큼이나 생겼을 위장에 고이 간직하고 소파에 기대어 낮은 코골이를 하고 있다.
그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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