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마디 끝이 자주 저린걸 보니 날씨가 많이 추워진 모양이다.
바람은 여지 없이 춥다고 느껴지고 밖에 나가서 놀다들어온
막내 녀석의 얼굴이 발갛게 바람을 맞은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
추석이 지나고 이렇게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할때 쯤 되면
가끔 마음까지 서리를 맞았던 겨울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려진다.
IMF로 남편이 하던 일을 접어야 하는 상황을 맞았었다.
설상 가상으로 마트안에 조그만하게 임대를 내어 하던
화장품 가게는 마트의 부도로 전세금 한푼 받지 못하고 나와야 했었다.
그리고 햇빛하나 들지 않는 조그마한 방한칸에 아이 둘을 데리고 살면서
남편은 수없이 일거리를 찾으러 다닐때였다.
그때 큰아이가 초등학교1학년 그리고 작은 아이가 두돌도 지나지 않아서 였다.
그렇게 몇달을 남편이 일자리를 찾던중에
예전에 다니던 직장 상사 분이 하시는 계란 도매업을 해보겠다면서
남편은 나와 아이들은 친정에 남편은 시누집에 살고 짐은
최소한 입을 것과 책가지만 남기고 이사짐센타 보관 창고에 맞기고
난 그 도매업을 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남편은 창고가 없는 대신 그곳에서 무상으로 일을 도우고
우리일도 하기로 했다.
창고는 김해공항을 들어서는 길목에 지여져 있었다.
난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가 넘어야 퇴근을 했다.
계란 농장에서 올때는 한판에 30개씩 되어 있지만
이곳에와서 10개 15개 소포장으로 캡술에 담아 다시 포장하는 일을 했다.
모든게 수작없이였다. 금이간 것은 골라 내고
닭똥이 많이 묻은 것은 털어내고
30개에서 소포장할때는 압축기를 이용했는데
그것 역시 완전한 자동은 아닌지라
계란 위에 기계를 올려놓고 조그마한 구멍을
막아 계란을 들어올려서 옮긴다.
그 구멍을 잘못 막거나 손이 미끄러지면
그곳에 달려있던 계란은 모두 떨어져
바닥에 키스와 함께 마사지를 하고
사장부인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단순노동이라지만 하루 열시간 이상을 손이 저리도록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해서 내가 받는 돈이 50만원이였다.
부산 시내에 있는 대형 마트에 나가는 물량을
사장 부인과 나 그리고 사장의 처형이렇게 세사람이
그 물량을 마추려면 당연 나의 일은 많았다.
그곳 사장 부인이 얼마나 지독한지
밥도 해먹어가며 다음날 나갈 물량을 맞춰어야 했다.
그래서 난 점심때 배를 든든히 채워두지 않으면
10시까지 견디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이때부터 난 위장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저녁은 늘 라면 이였고 간식은 직원들 버릇나빠 질까봐
안준다고 했다. 나말고도 배송 기사 3명이 더 있었다.
계란 상할 까봐 난로는 그해 겨울이 가도록 구경도 못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내복에 두꺼운 잠바에 그래도 귀와 발은 동상이 걸려
따뜻한 곳에 들어 가면 가려워 힘이 들었다.
남편 역시 낮에는 이곳 일을 해주고
다 늦게서야 내일 우리가 나갈 물량의 일을 했다.
구정이였던 것 같다. 남편이
경남지방의 시에서 저소득층에 명절 선물로 계란 30개짜리 두개씩 묶어
배송해 달라는 오더를 받아온적이 있었다
갯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5톤 분량의 계란이였으니 결코 작은 양은 아니였다.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는
회사의 물량도 작업을 해야하고
남편이 받아온 물량도 작업을 해야했다
남편과 난 거의 일주일 바닥에 누워서 몇시간 잠을 못자고 일을했다.
그때는 사는게 전쟁이였다.
아이들 얼굴조차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하면 남편과 아이들과 살길이 열릴거라 생각해서
있는 힘껏 꽤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한번은 몸살이 나서 정말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의 과로로 인해서
출근을 못한 적이 있었다.다음날 출근했더니
사장부인의 냉대는 아픈몸보다 더 가슴을 파고 들었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남편과 난 그렇게 10개월 정도로 일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몇달동안 남편이 판 물건의 가격을 정산해 주지 않아
여러번 독촉을 했는데 그노력의 댓가는 백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였다.
그리고 내게 남은건 위장병 뿐이다.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지금도 등골이 저리고 가슴이 시린걸 보면
난 아직도 나의 삶의 일부분이였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직 원망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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