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처럼 구두를 닦았다.
과거처럼의 '돈벌이'가 아닌 순수한
내 식구들의 가족 구두를 상대로 한 공짜의 구두닦기를.
구두를 닦으려면 우선 솔로
구두에 들어붙은 먼지부터 털어 내야 한다.
다음으론 검정(분홍)색의 구두약을 적당히 바른다.
욕심을 내어 너무 많아 바르면 오히려 광택도
안 나고 구두의 질감마저 죽는다.
다음으론 '융'이란 섬유를 이용하여
구두약을 묻혀 정성껏 광을 내야 한다.
이 때 웃기는 건 사람의 침을 조금 묻혀줘야
광이 더 잘 난다는 사실이다.
예전엔 일요일마다 집에서 구두를 닦았댔다.
내 구두를 필두로 아내와 아이들의 구두까지를
모두 닦노라면 흡사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고 온 양
그렇게 내 마음마저 덩달아 개운하곤 했다.
당시엔 구두가 많았다.
내 구두만 하더라도 요일마다 바꿔 신는
구두가 따로 있었기에 무려 여섯 켤레나 되었으나 말이다.
하지만 오늘 모처럼 구두를 닦으면서 보니
내 구두는 이제 단벌구두, 즉 달랑 하나 뿐이다.
그러니까 구두의 존재숫자를 보자면
내가 처한 경제적 현실의 어떤 함수관계의
답이 보이는 셈이기도 하다.
지난 추석 전에 구두를 하나 사려고 했었다.
비싼 건 언감생심이고 지금은 그 브랜드 가치가
사라진 어떤 과거 유명 브랜드의 구두인데
한 켤레가 3만 9천원이랬다.
지금도 대전역 앞에 매장을 두고 팔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 구두점에 갈라손 치면
꼭 그렇게 다른 용도로서 돈이 엉뚱하게 나가곤(지출) 했다.
그런 때문으로 지난 추석날에도 뒷 굽의 한 축은
얼추 망가진, 지금도 신고있는 구두를 신고
고향에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까짓 거, 눈 딱 감고 그깟 구두 하나를
못 사랴마는 그러나 현실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최우선의 급선무는 서울에 유학 가 있는
딸내미에게 보내줘야 할 돈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시절 불우하여 남들은 학교에 갈 적에
나는 역전에서 구두를 닦아야 했다.
헌데 오후가 되어 또래들이 교복을 입고
내 근처에 나타날 즈음이 나는 가장 싫었다.
그럴 때 나는 늘 그렇게 고개를 꺾고
땅바닥만을 쥐 죽은 듯 응시했어야 했으니 말이다.
구두닦이 선배로부터 맞기도 여반장이었던
그 험난하고 지독한 가난의 폭풍이 진득했던 시절도
이러구러 무심히 지나 여류한 세월은
나를 지천명의 초입에 데려다 놓았다.
여섯 켤레의 구두가 이젠 달랑 하나 뿐이지만
나는 결코 빈부(貧夫)가 아니다.
나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알토란같은
두 자녀가 엄존하는 때문이다.
내일은 월요일.
내가 오늘 닦고 광을 낸 구두를 신고
내 아내와 아들은 직장으로 학교로 가리라.
신고있는 구두가 불결하면
뭣 보고 밑 안 닦은 것처럼 찜찜함은 인지상정이다.
오늘 내가 정성껏 닦은 구두를 신고
아내와 아들이 잠시 잠깐이나마
만족의 빙그레 미소를 머금는다면
나로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겠음에 더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