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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BY 휘발유 2006-10-22

대전 역전시장 내엔 요즘 보기 드믄 곳이 하나 있다.
거기서는 탁주인 막걸리도 값이 헐하고
안주 겸 배도 채울 수 있는
순대국밥 한 그릇이 고작 1천원인 때문이다.

예전엔 <VJ특공대>에도 나왔던 곳이라
그 곳 사람들은 물론이요
주머니가 가벼운 필부들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는 식당이기도 하다.
하여 나도 가끔 들러 이 풍진 세상사를, 또한
내 맘대로 영 안 되는 이 엿 같은 세상에 대한
반감의 개인적 응어리까지를 모두 모아
그 탁주에 쓸어 담아 마시곤 휑휑히 돌아오곤 한다.

탁주를 처음으로 마셔본 건 '싸가지' 없게도
고작 내 나이 열 살도 안 된 즈음부터였다.
당시는 탁주를 항아리에 묻어놓고 팔았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가
탁주를 사 오며 갈증 핑계를 대고 맛을 본 게 시초다.

군대에 가기 전엔 '노가다'를 했는데
일당을 받으면 함께 일하던 지기와
선술집에 가는 게 당시의 낙이었다.
넓직한 대접에 막걸리를 철철 넘치도록 따른 뒤
김치가 뒤섞인 두부 한 모를 바라보자면
그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았으니 말이다.

탁주(濁酒)는 한문의 의미 그대로
그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다.
또한 알코올 돗수도 소주처럼 독하지 않아
예로부터 서민과 특히나 농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소주는 과하면 일상을, 더불어 농삿일까지를 못 하기 십상이지만
막걸리는 중간에 오줌만 서너 번 ‘깔기면’ 너끈한 때문이(었)다.
 
요즘 서민들은 거개가 맑은 소주를 즐기는 경향인데
이따금 탁주를 마시는 재미도 별나다.
소주는 고기(肉)라는 파트너가 어쩌면 필수지만
탁주엔 그깟 것조차 어쩌면 무용지물인 까닭이다.

탁주의 안주로는 단연 김치가 압권이다.
아무런 김치라도 상관없지만 먹기도 전에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도는
깍두기와 배추김치라면 동가홍상이다.

어제는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신이 내린 직장인’이
아니었음에 다시금 출근했다.
오전근무를 마치고는 간만에 집까지 걷기로 하였다.
걷는 것 이상으로 운동에 좋은 건 없음인데
요즘은 그걸 간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 싶다.

여하튼 차로 이동치 아니하고 휘적휘적 걷노라면
다양한 군상들의 세상사는 모습과
이런저런 풍경까지를 보너스로 구경할 수 있어 좋다.

원동 네거리에서 눈도 못 뜨고 있는 강아지를 팔고자 나온
아낙과 텃밭에서 뜯어 왔음직한 푸성귀를 사라고 하는
아줌마를 지나 대전역 바로 옆의 역전시장을 또 들렀다.

주머니에선 늘상 찬바람만 부유하며
시쳇말로 'X 나게' 못 사는 때문으로
역전시장 내의 1천원짜리 순대국밥이
어쩜 나에겐 가장 합당한 친구이지
싶다는 게 평소의 ‘사관’이다.

순대국밥에 이어 탁주도 한 대접을 시켰다.
근데 모처럼 탁주를 입에 대자니
뜬금 없이 예전에 일독했던
채만식의 ‘탁류’의 초봉이가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탁류’는 그 제목이 암시하듯 처음에는 맑던 강물이
점차 탁하게 바뀌어 가는 졸가리를 이루고 있다.
헌데 주인공 초봉이의 그같이 기구한 운명과
시대적 가혹한 수탈 따위의 고난은
어쩌면 작금 내가 겪고 있는 비루한 상황과
엇비슷하지 않나 싶었음에 ‘탁류’의 초봉이는 그래서
내 곁에 더욱 다가 와 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탁주를 마시는데 나보다 더 못 한 군상, 더 적확히
따지자면 근방의 노숙자로 보이는 이가 하나 들어섰다.
입성은 추레했고 머리는 마치 장발장을
연상케 하는 데다가 악취마저 진동을 하는. 

그러자 내 맘은 금세 바뀌어
그래서 이내 초봉이를 떠나보냈다.
그리곤 서둘러 셈을 치루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그래! 맞다.
올려다보면 욕심이지만 내려다보면 허공이다.
내가 왜 또 잠시 탁주를 빙자하여
잘 되면 내 탓이요, 못 되는 조상 탓이란
더러운 생각을 담았던가...
이제 그같이 더티한 생각은 그만 제발 버리자!

그렇지만 하늘색은 작금의
내 빈궁한 현실을 선연히 반영하듯
탁주처럼 그렇게 탁하기 그지없었다.
돈을 어서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 색깔이 뿌얘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당최 보이지 않는, 하여 어쩌면
내 암울한 인생과도 같은 혼탁한 탁류의 세월을
이제 다시는 맞지 말아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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