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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싸는 여자
BY 임혜경 2006-08-31
아이들이 돌아가며 속을 썩이면,
남편에게 받은 섭섭함이 겹겹이 쌓이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나의 행동 중 하나가
짐을 싸는 일이다.
[허걱!이런 큰일날..]
어디라고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쉬었다 올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허허벌판 황야같은 미국땅 어느곳 하나
날 반겨줄 곳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무작정 싸고본다.
막연히 이 현실을 떠나 도망하고 싶은 불같은 충동에,
어딜가도 여기보다는 낫겠지 싶은 어리석은 오판에,
한가지 더하자면 이렇게라도 내자신을 속이지 않고는
내가 견딜 수 없기에...
[딱 한가지만 더 붙이자면 아이들에게 겁도 줄겸하여...]
한번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면 나는 엄청난 일군이 된다.
평소엔 팔힘 없다고 몸사리고,
조금만힘썼다 싶으면 여기저기 쑤시고,
뭐한번 했다하면 꼭 몇군데 멍들고,
한번 다치면 잘 낫지도 않는 약골인 내가 말이다.
그 체력과 속도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말 나도 궁금할 정도다.
흩뜨러진 머리카락 하나없이 헤어스프레이 뿌려 붙이고,
몸에 딱맞는 작업복 갈아 입고,
필요에 따라 손에 면장갑 끼워주고,
입술은 붙어버릴 정도로 꼭 다물고,
두눈은 불이라도 붙을 듯 부릅뜨고,
눈썹을 휘날리며 바람과 같이 오가는 나의 민첩함!
한번 탄력 받으면 일이 얼마나 잘 되는지 나중엔 신이나서 화가 풀려버리곤 한다!!
[이야기가 심천포로 빠지려 하길래 다시 잡아온다..]
어제도 나는 짐을 쌌다.
한동안 나태한 생활을 했던 탓인지,
아이들과의 씨름에 기운을 다 써버린 탓인지
어제는 영 나의 기민함이 살아나질 않는 것이었다.
세면도구와 화장품 몇가지를 작은 가방에 챙겨넣는데 쓰던 치약이 없다.
그렇다고 어린아이 팔뚝만한 새치약을 챙겨넣자니 참 거시기하다.
낮에 혼자 빨빨거리고 돌아다닐거면 썬블록크림도 필요한데 넣어말어?
헤어스프레이는 왜또 이렇게 큰거야?
안되겠다 싶어 일단 꺼내놓기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 몇가지를 꺼내들려는데 열어놓은 창문밖으로
도로바닥을 살짝 긁는듯한낡은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순간 창문으로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역시나... 남편이 아니다...
이럴때 남편이라도 들어오면 짐싸려던거 숨겨놓고
한풀이든 화풀이든 뭐라도 해서 풀어버리고
모여앉아 저녁식사라도 할텐데...
속이 꽉 막혀오고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꺼내려던 가방대신 아예 가방있던 자리에 들어 앉아버렸다.
그리곤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뭐가 이렇게 힘든거야?
뭐가 이렇게 초라한거야?
얼마동안을 그렇게 앉아있으려니 다리가 저려온다.
불켜고 있으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이 골방이 무섭게도 느껴진다.
배도 무지 고프다.
오늘은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지나간다.
남편도 없는 이 빈집에 어린 두아이만 달랑 남겨두고 나가버릴만큼
내가 용감한 여자는 아니란데 생각이 미치자 힘이 푹 새나가 버린다.
허탈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다, 내 꼴이...
그래 됐냐?
그래 됐다!
내가 되었다는데 뭘...
나는 살며시 골방을 빠져나와 저녁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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